‘생지옥’ 신민당사… 경찰 “김영삼 총재는 때리지 말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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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93>김경숙

1979년 8월 11일 새벽, 경찰들에 의해 끌려 나오는 YH무역 여공들. 이 과정에서 김경숙 양이 목숨을 잃었다. 동아일보DB
1979년 8월 11일 새벽, 경찰들에 의해 끌려 나오는 YH무역 여공들. 이 과정에서 김경숙 양이 목숨을 잃었다. 동아일보DB
1979년 8월 11일 새벽 신민당사는 ‘생지옥’으로 변했다.

당원들은 현관 셔터를 내려 경찰 진입을 막으려 했으나 정·사복 경찰 1000여 명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무리의 경찰들이 2층 유리창을 부수고 복도로 뛰어 들어와 청년당원들과 난투극을 벌였다. 그 사이 다른 경찰들이 셔터를 부수고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당원들은 경찰관들의 곤봉 세례에 쓰러져 ‘닭장차’에 실렸다.

진입에 성공한 경찰들은 2개 조로 나뉘어 한 패는 4층 농성장으로, 다른 한 패는 2층 총재실로 몰려갔다. 총재실에는 김영삼 총재와 국회의원, 당원, 기자 등 50여 명이 있었다. 경찰은 벽을 부순 뒤 벽돌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이윽고 “총재는 때리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키 작고 안경 쓴 놈이 황낙주다” 외침이 나오더니 원내총무 황낙주가 구둣발 밑에 깔렸다. 잠시 후 누군가 “저놈이 박권흠이다” 외치자 대변인 박권흠 손이 뒤로 꺾이면서 얼굴이 피범벅이 되도록 난타당했다. 그는 이날 갈비뼈가 부러졌다.

당 청년국장도 실신할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 기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분증을 내보였으나 “기자고 지랄이고 입 닥쳐!” “신문기자 좋아 하네” 욕설과 함께 곤봉,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카메라도 박살이 나고 필름도 빼앗겼다. 벽돌에 맞아 팔다리가 부러지는 사람이 속출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 나갔다. 김 총재도 끌려 나와 경찰 승용차에 실려 상도동 집으로 옮겨졌다.

농성장이던 4층 강당은 여성 노동자들의 비명소리와 연막 가스탄으로 뒤덮였다. 경찰들은 이들을 한 명 한 명 끌어냈다. 곤히 잠들었다 놀라 깨어 일어난 여공들은 사이다병 등을 깨어 들고 울부짖으며 반항했다. 일부는 창문을 주먹으로 깨고 뛰어내리려다 제지하는 경찰에 붙들렸다. 농성자들은 진압 시작 불과 10여 분 만에 모두 당사 밖으로 끌려나와 ‘닭장차’에 쑤셔 넣어졌다. 진압작전은 총 23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야당 당사가 이렇게 노골적이고도 야만적으로 짓밟힌 것은 헌정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전 2시 반경. 마치 폭격을 맞은 듯 당사가 폐허로 변했다. 경찰의 진압작전은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작전을 마치고 현장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참혹한 죽음이 발견되니 바로 김경숙이었다. 그는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 쓰레기통 옆에서 왼팔 동맥이 끊기고 정수리 부분에 길이 3cm가 파인 상처를 입은 채 발견된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진다. 경찰은 사망 원인에 대해 세 차례나 말을 바꿨다. 처음에는 “4층에서 떨어지는 것을 경찰이 받았다”고 했다가 “동맥을 끊은 뒤 투신해 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했다”고 했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동맥 절단 뒤 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김경숙의 시신은 경찰과 몇몇 유족만이 입회한 가운데 화장터에서 재로 변했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부검 보고서와 시신 사진을 근거로 “손목에는 동맥을 끊은 흔적이 없고, 손등에는 곤봉 같은 둥근 물체로 가격당한 상처가 발견되었다. 사인은 투신자살이 아닌 경찰의 강제 폭력진압 과정에서 추락사한 것”이라면서 “김경숙이 진압 직전 투신자살했다고 밝힌 당시 경찰 발표는 모두 조작된 것”이라고 했다.

2012년 7월 서울중앙지법은 고인의 어머니 등 2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위자료 2억5000여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가해자가 돼 위헌적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김경숙의 비극적인 삶은 그 시절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 계층으로 ‘공순이’라 불리며 멸시받고 조롱받던 전형적인 ‘여성 노동자’의 삶이었다.

그녀는 빈농의 딸이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빚보증을 잘못 서 그나마 있던 땅을 날려 버리고 행상을 하다 그녀가 8세 때 세상을 등졌다. 김경숙은 어머니가 날품을 파느라 집을 비우면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을 돌보며 자랐다. 그리고 15세가 되던 해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김경숙은 생전 일기에서 “내가 배우지 못한 공부를 가르쳐서 동생만은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고 적었다.

기대했던 서울 생활은 ‘꿈’에 불과했다. 그녀는 일기에 “혼탁한 먼지 속에 윙윙거리는 기계 소리를 들으며 어언 8년 동안 남은 것은 병밖에 없다”고 적었다.

한편 김경숙 죽음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며칠 뒤, 농성하던 YH 여공들의 식사를 날라주던 당사 인근 식당 여종업원이 자살하는 사건까지 일어난다. YS는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서 ‘K형에게’라는 글을 통해 그 처녀의 죽음을 이렇게 애도했다.

‘음식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그 처녀는 음식을 나르면서 보게 된 여공들의 참상과 끝내는 밤중에 경찰에 의해 개처럼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이 세상을 더이상 보기가 싫어 몸을 던진 것이오. 이것은 비록 한 이름 없는 사람의 일이지만 이 세상에 이렇듯 이름 없이 자기의 뜻을 밝히는 사람이 어디 하나둘이겠소? 지금도 그 처녀의 일을 애처롭게 느끼는 것은 나 한 사람만 아닐 것이오.’

YH 여공들의 농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당원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기자들까지 무차별 구타한 일은 전 국민의 공분을 샀다. 여기에 꽃다운 여성 노동자까지 숨지자 이제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김경숙#김영삼#신민당사#경찰#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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