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살인? 성도착? 시신 유기 의사, 마취제 등 13종 약물투입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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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 수사발표 남는 의문

피해여성의 생전 마지막 모습 피해여성 이모 씨가 지난달 30일 오후 11시경 H산부인과에 걸어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담긴 폐쇄회로(CC)TV 화면. 서울서초경찰서 제공
피해여성의 생전 마지막 모습 피해여성 이모 씨가 지난달 30일 오후 11시경 H산부인과에 걸어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담긴 폐쇄회로(CC)TV 화면. 서울서초경찰서 제공
7월 31일 0시경 서울 강남구 신사동 성수대교 남단 사거리에 있는 H산부인과 병실 안. 이 병원 소속 산부인과 전문의 김모 씨(45)는 링거에 담긴 수면유도제 ‘미다졸람’ 5mg과 생리식염수를 이모 씨(30·여)에게 투약했다. 수면유도제가 이 씨의 왼쪽 팔로 흘러들어가자 이 씨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15분 뒤 이 씨가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깬 이 씨를 바라보던 김 씨는 다른 링거의 주입량 조절장치를 열었다. 뚝뚝. 약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김 씨는 이 씨와 성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이후 이 씨는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두 번째 링거에는 사람의 호흡을 멈추는 치명적인 약물이 섞여 있었다.

○ 호흡 멈추는 마취제 섞어

사건 발생 10일째. 산부인과 의사 시신 유기 사건의 감춰진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이 씨의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구속된 의사 김 씨를 업무상 과실치사, 사체유기,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의료법 위반 등 혐의로 9일 검찰에 송치하기로 했다”고 8일 밝혔다. 당초 “이 씨에게 수면유도제를 투약했더니 숨졌다”는 김 씨의 진술과 달리 김 씨는 호흡곤란을 일으킬 수 있는 마취제를 투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달 30일 오후 10시 반경 미혼여성인 이 씨는 김 씨가 보낸 “언제 우유주사 맞을까요”란 문자메시지를 받고 오후 11시경 병원에 왔다. 우유주사는 흰색인 수면마취제 프로포폴을 지칭하는 은어다. 잠을 푹 자게 해 피로를 풀어준다고 해서 의사나 유흥업소 종업원 사이에서 ‘힘주사’라고도 불린다.

[채널A 영상]산부인과 로비 영상

이 씨가 먼저 김 씨의 진료실로 들어갔고 밖에서 술을 마시던 김 씨도 곧 들어갔다. 이곳에서 김 씨는 이 씨가 보는 앞에서 직접 약을 섞었다. 링거 한 병에는 생리식염수와 수면유도제 미다졸람을 섞었다. 이 씨가 “평소 맞던 프로포폴과 다르다”고 하자 김 씨는 “이것도 효과가 괜찮다”며 안심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하트만덱스(포도당 영양제) 1L가 담긴 나머지 링거에 수술용 마취제의 일종인 나로핀, 베카론, 리도카인 및 비타민제 비콤, 진통제 케로민, 항생제 박타신 등 10종류의 약품을 섞었다. 낯선 약들이 불안했을까. 이 씨는 스마트폰으로 베카론, 리도카인, 박타신의 용도를 검색했다. 수면유도제는 김 씨가 직접 간호사에게 “내가 잠을 못 잔다”며 받아왔고 마취제는 제왕절개 수술이 끝난 3층 수술실에서 다른 의사와 간호사 몰래 가져왔다고 진술했다.


▲동영상=‘우유주사’ 피해 여성 마지막 모습 CCTV


○ 과실치사인가, 고의살인인가


경찰은 “혼합한 마취제로 사람이 사망할 수 있다는 전문의 의견을 토대로 미필적 살인을 포함한 ‘살인의 고의’에 의한 범행으로 보고 엄중 추궁했으나 살인 혐의를 적용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링거로 투약하면 생명에 지장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으며 살해할 의사는 없었다는 피의자 진술과 ‘살인의 고의’로 볼 만한 증거가 없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김 씨는 거짓말 탐지기 조사 당시 “피의자는 피해자를 살인할 의도가 있었나”, “(상대방이)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투약했나”라는 경찰의 질문에도 거짓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의료 전문가들은 다르게 보고 있다. 공명훈 고려대 의대 마취통증의학교실 교수는 “전신마취제인 베카론이 호흡 정지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경력 10년차 의사가 모를 리 없다”고 말했다. 또 한 전문가는 “호흡 대체기 없이 심장이 멎을 수 있는 국소마취제 나로핀까지 마구 섞은 것을 볼 때 살인할 의사가 있었다는 의심을 살 만하다”고 말했다. 김 씨가 투약한 나로핀 병에는 ‘정맥 내 주입 금지’라는 문구가 표시돼 있다.

경찰은 “김 씨는 약을 섞은 이유에 대해 ‘이 씨가 잠이 잘 안 온다고 해서 섞었다’는 진술로 일관한다”며 “부검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김 씨가 마취제를 투약한 동기를 우리가 알 수는 없다”고 했다. 2009년 6월 프로포폴 과다 복용으로 자택에서 숨진 마이클 잭슨 사건 당시 주치의 콘래드 머리 박사(58)의 과실치사 여부를 두고 오랜 논란을 빚었는데 프로포폴만 투약한 잭슨의 경우에 비해 이번엔 마취제까지 섞었다는 점에서 살해 의도를 놓고 법정 공방이 예상된다.

○ 성도착증 의혹도

사건 당시 김 씨가 이 씨에게 마취제를 투약하고 성관계를 가진 사실이 드러나자 일각에서는 김 씨가 강한 성적 자극을 노리고 마취제를 쓴 것이 아니냐는 추정도 나온다. 1년 전 알게 된 두 사람은 가끔씩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을 때마다 프로포폴을 투약하고 성관계를 가져왔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S 씨는 “김 씨의 과거 전력 그리고 산모가 입원하는 병실에서 성관계를 맺은 정황을 볼 때 강한 성적 자극에 집착하는 성도착 증세도 보인다”며 “마취상태에선 사람이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지기 때문에 ‘네크로필리아 증후군’(시체애호증·시신을 상대로 성행위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일종의 정신질환)에 가까운 변태성향도 추측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수면유도제나 수면마취제를 손쉽게 구하는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투약하고 성폭행하거나 성추행하는 사건이 간혹 발생하지만 이미 내연관계에 있는 여성에게 상습적으로 투약을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혹도 남았다. 경찰은 “두 사람 사이의 돈 거래 관계는 드러난 바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가끔 연락을 할 때마다 약을 투약하고 성관계를 맺은 정황을 감안했을 때 김 씨와 이 씨가 서로 수면유도제와 성을 교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 씨는 1년 전 진료를 계기로 이 씨를 알게 된 이래 경찰이 확인한 것만도 6차례 이 씨의 집에 들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씨의 지인은 “이 씨가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아 의사 김 씨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을 필요가 없다”며 “평소 잠을 잘 자지 못해 수면제를 자주 복용하긴 했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의약품을 허술하게 관리한 병원의 책임을 물어 대표 방모 씨 등을 입건해 수사할 예정이다. 정확한 사인을 밝혀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결과는 열흘 뒤 나올 것으로 보인다.

[채널A 영상] 1년 전 부터 집에 찾아가 수면유도제 놔주고 성관계 맺어…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시신 유기사건#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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