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권재현의 트랜스크리틱]웃음의 계보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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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6일 17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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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인생을 연극에 비유한 극작가들에 따르면 희극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왜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 연극의 주류가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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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인생을 연극에 비유한 극작가들에 따르면 희극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왜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 연극의 주류가 됐을까? 동아일보 자료사진

고래로 인생을 한 바탕의 연극에 비유한 작가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 연극은 꿈처럼 허망한 것, 실체가 없는 그림자와 같은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그 연극은 본질적으로 비극일까요, 희극일까요. 인구에 회자되는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말이 보여주듯 그것은 희극입니다. 십분 양보한다고 해도 희비극일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연극의 주류는 늘 비극이었습니다. 서양연극의 기원으로 꼽히는 그리스비극이 그러하고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으로 제일 먼저 4대 비극이 꼽히는 것처럼. 고대 그리스의 연극제는 비극의 경연장이었고 희극은 막간극으로 공연됐을 뿐입니다. 일본 연극에서도 노(能)나 가부키(歌舞伎)는 비극이 주류였고 희극인 교겐(狂言)은 그 막간극으로 공연된 비주류 장르였습니다.

그럼 이는 왜 그런 걸까요? 연극이 본디 종교적 제의의 속성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것보다는 눈물로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 제의에 더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웃음은 왜 엄숙한 종교와 어울리지 않을까요? 단순히 경망스러워 보이기 때문에? 하지만 본디 고대 종교적 제의라는 것이 본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과 망아(忘我), 대동(大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웃음이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미스 스마일 퀸 선발대회에 출전한 미래의 스튜디어스들. 웃으면 복이 오고 평화가 찾아온다고? 웃음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신호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동물들에게 이를 드러내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기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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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스마일 퀸 선발대회에 출전한 미래의 스튜디어스들. 웃으면 복이 오고 평화가 찾아온다고? 웃음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신호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동물들에게 이를 드러내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기해보라. 동아일보 자료사진

여기엔 인류학적 성찰이 좀더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모든 동물 중에 웃는 동물은 인간뿐이라는 말이 맞는다면 그 웃음의 기원에 대한 성찰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웃음이 집단공격의 징표였다는 주장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생의 동물에게서 이를 드러내는 것은 공포와 공격의 표시입니다. 이 때문에 웃음이라는 것이 원시인류의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일종의 집단 따돌림의 신호로 계발됐을 것이라는 추론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웃음은 비웃음입니다. 먹을 게 부족하다거나 공간이 협소해서 무리 중에 누군가를 낙오 내지 희생시켜야할 때가 종종 옵니다. 그럴 때 무리에서 가장 약한 존재를 향해 '썩소'를 날리는 것이 그 대상을 집단 선택하는 신호로 작동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섬뜩한 이 추론은 인류문화의 기원이 희생양 문화에 있다는 프랑스 문화이론가 르네 지라르의 이론과 절묘하게 공명합니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은 모방의 동물인 인간이 서로의 욕망을 상호 모방하다가 첨예한 갈등상황을 빚게 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축적되면서 전체공동체의 위기로 비화하는 순간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무고한 희생양을 선택해 집단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무차별적 폭력은 집단죄책감을 낳으면서 사회적으로 팽배했던 갈등수준을 급랭시키는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사람들은 그 죄책감을 씻어내는 한편 공동체에 평화를 가져다준 그 무고한 희생양을 기리기 위해 그를 신격화합니다. 그런 신격화가 종교의 탄생을 낳았고 종교적 제의의 일환으로서 서사시나 연극과 같은 예술의 원천이 됐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비)웃음은 사람들이 씻어내고자 하는 집단죄의식의 출발점입니다. 자신들이 신격화한 존재를 희생물로 선택할 때 첫 신호가 (비)웃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희생양을 신격화하고 영웅시하는 연극제의에서 웃음은 금기시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심리학자들도 코미디의 본질에 사람들의 통념과 벗어난 존재에 대한 조롱이 숨어있다고 지적합니다. 뚱뚱이와 홀쭉이로 대변되는 코미디언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대부분 일반적 사람과 다른 외모를 갖춘 튀는 존재들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코미디가 인기 있는 이유 역시 소수의 권력을 쥔 사람들을 조롱하고 풍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오늘날 인기 있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가만히 뜯어보면 우리와 다른 그들을 희화화하는 요소가 심상치 않게 등장합니다.

하지만 웃음 역시 진화합니다. 공격의 상징이던 웃음이 점차 인간의 모든 생활에 침투하면서 평화를 상징하는 신호로 전환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웃음은 집단의 갈등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 과열된 상황을 막는 윤활유로 작동합니다. 그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일까요? 어쩌면 유머라는 말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아닐까요?

오늘날 웃음을 유발하는 재치를 뜻하는 유머는 본디 좋은 기질이라는 뜻의 영어 '굿 유머(good humor)'에서 출발했습니다. 16세기 영국에서 유머는 피, 점액, 담즙, 흑담즙이란 4가지 체액의 비율로 결정되는 인간의 기질을 뜻했습니다. 피가 우세하면 다혈질의 사람, 점액이 우세하면 둔중한 사람, 담즙질이 우세하면 화를 잘 내는 사람, 흑담즙질이 우세하면 우울한 사람이 된다는 식이죠. 굿 유머란 이런 체액이 골고루 잘 섞인 기분 좋은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18세기 경 good이라는 말이 빠지면서 그냥 유머만으로 '자신과 주변을 유쾌하고 행복해주는 재치'를 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머를 갖춘 유머리스트(humorist)의 자질을 살펴보면 웃음의 역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이뤄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머리스트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약점과 결함조차 즐겁게 묘사할 수 있는 여유를 갖춘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은 삶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자신의 약점을 직시할 줄 알기 때문에 타인의 약점이나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삶에서 보잘 것 없거나 열등한 것에 대해 연민의 시각을 갖춘 사람이 곧 유머리스트인 것입니다.

서양 코미디의 역사를 살펴보면 희극이 연극의 주류로 발전한 시점이 대략 15, 16세기 르네상스기를 거치면서라는 점에서 이는 상당히 유의미한 통찰을 안겨줍니다. 오늘날 유럽 희극의 출발점으로 거명되는 이탈리아 '코미디아 델 라르텔'의 전통이 16세기 경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배우들의 광대연기술로 웃음을 자아내는 코미디아 델 라르텔의 전통이 프랑스로 건너가 17세기 몰리에르 희극으로 발효되면서 웃음의 대명사인 피에로의 전통이 확립되기 때문입니다.
제1회 대학로 코미디페스티벌의 개막작으로 공연된 '휘가로의 결혼'
사진 제공 한국공연예술센터
제1회 대학로 코미디페스티벌의 개막작으로 공연된 '휘가로의 결혼' 사진 제공 한국공연예술센터

지난 연말부터 대학로에서 펼쳐지고 있는 '제1회 대학로 코미디 페스티벌'에 소개되고 있는 희극작품들은 묘하게도 이런 웃음의 발전과정을 보여줍니다. 12월10일~26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실험극장의 '휘가로의 결혼'(구태환 연출)에 등장하는 휘가로는 피에로로 확립되기 전 코메디아 델 라르텔의 수많은 광대 중 하나입니다. '세비야의 이발사'였던 휘가로는 당시 권력자였던 귀족들을 놀리고 조롱함으로써 민중의 웃음을 자아냈던 캐릭터로 우리나라의 말뚝이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관객의 웃음을 끌어내는 배우의 연기술에 초저을 맞춘 코메디아 델 라르텔의 전통을 한국적 널뛰기와 접목시킨 극단 수레무대의 '스카펭의 간계'.
사진 제공 한국공연예술센터
사진 제공 한국공연예술센터
관객의 웃음을 끌어내는 배우의 연기술에 초저을 맞춘 코메디아 델 라르텔의 전통을 한국적 널뛰기와 접목시킨 극단 수레무대의 '스카펭의 간계'. 사진 제공 한국공연예술센터 사진 제공 한국공연예술센터

21일~26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극단 수레무대의 '스카펭의 간계'(김태용 연출)에 등장하는 스카펭은 이 휘가로의 선배격인 인물입니다. 스카펭은 본디 코미디아 델 라르텔의 작품에 등장하는 약삭빠른 하인으로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극작가 몰리에르가 자신의 작품에 변용시킨 인물입니다. 굳이 희극적 족보를 따지자면 스가펭-휘가로-피에로의 순서가 되는 셈입니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유럽궁정희극을 조선시대로 옮겨와 한국의 마당극 전통과 접목시킨 '사랑의 헛수고'의 한 장면. 한국적 탈춤과 유럽의 가면무도회를 접목시킨 위트가 돋보인다.
사진 제공 한국공연예술센터
셰익스피어 원작의 유럽궁정희극을 조선시대로 옮겨와 한국의 마당극 전통과 접목시킨 '사랑의 헛수고'의 한 장면. 한국적 탈춤과 유럽의 가면무도회를 접목시킨 위트가 돋보인다. 사진 제공 한국공연예술센터

'스카펭의 간계'에 이어 12월29일~1월6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사랑의 헛수고'(김성노 연출)는 이런 서양희극의 전통이 한국연희의 전통과 절묘하게 공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7세기말에 발표된 이 연극은 귀족사회의 위선적인 성 모럴을 자유분방한 민중의 시각에서 풍자한 작품입니다. 연출가 김성노 씨는 이 전형적인 궁정희극을 조선시대로 옮겨와 공자왈 맹자왈 하는 양반들을 풍자하는 마당극으로 풀어냈습니다. 여기서 스카펭과 휘가로의 역할을 대신하는 게 돌쇠와 마당쇠입니다.

'사랑의 헛수고'의 번안과정에서는 희극의 또 다른 중요 요소로서 위트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다음 회에서는 유머와 차별화되는 위트와 아이러니에 초점을 맞춰 웃음의 진화과정에 따른 희극의 변천사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때까지 코미디 페스티벌에서 공연될 '국물 있사옵니다'(1월9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3관), '살아있는 이중생각하'(1월8일~16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유쾌한 유령'(1월14일~23일 대학로예술극장3관), '처음처럼'(1월27일~2월6일 대학로예술극장3관)을 많이들 봐주세요! 1만5000~2만 원. 02-3668-0051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오·감·만·족 O₂는 동아일보가 만드는 대중문화 전문 웹진입니다. 동아닷컴에서 만나는 오·감·만·족 O₂!(news.donga.com/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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