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존을 향해/2부]<2>누가 法을 ‘만만한 것’으로 전락시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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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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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제멋대로 한국 법치

《24일 오후 6시 유흥가 한복판에 위치한 서울 영등포경찰서 중앙지구대와 강남서 역삼지구대. 경찰들이 ‘취객과의 전쟁’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취재팀이 ‘다음 날 새벽까지 지구대에서 머물면서 동행취재를 하겠다’고 하자 김명수 중앙지구대 순찰팀장은 웃으며 “오늘밤은 죽었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말했다. 술값을 내지 않아 시비가 붙은 사람, 대리운전기사가 같이 술 마신 친구의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고 시비를 건 취객…. 오전 2시가 지나자 두 지구대는 ‘취객 해방구’로 변했다. 이날 영등포서 중앙지구대는 사건 72건을 접수했다. 폭행(32건), 교통위반(10건)을 포함해 술값 실랑이, 말다툼 등 소소한 범법행위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법을 어긴 시민들은 당당했다. 지구대 대원들도 당당한 시민에 익숙해져 있었다. 취객이 삿대질을 해도 누구 하나 얼굴색조차 붉히지 않았다. 왜 시민들은 경찰로 상징되는 법치, 그리고 공권력을 이토록 가벼이 보는 것일까.》

■ 법치에 대한 불신

2010년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는 어디쯤 와 있을까.

한국법제연구원은 2008∼2009년 일반 국민과 법 전문가(국회의원, 판검사, 공무원, 법학자)의 법의식을 조사했다. ‘법이란 말을 들으면 먼저 어떤 느낌이 드느냐’는 질문에 전문가 집단은 7.6%가 ‘불공평하다’고 답변한 반면 일반 국민은 32.6%가 ‘불공평하다’고 응답했다. 법의 공정성에 대해 불신하는 국민이 많은 것이다. 놀랍고도 심각한 것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론’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런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전문가의 경우 1.6%밖에 되지 않았다. 유전무죄의 잠재적 수혜 대상이자 법을 세우고 집행하고 해석하며, 이런 현상을 가까이서 관찰할 만한 위치에 있는 전문가 집단일수록 그 말은 틀렸다는 응답을 적게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경찰조차 ‘법치의 상징’으로서 심각한 흠결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운전자들은 도로에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교통위반은 ‘경찰순찰차에 의한’ 위반임을 잘 알고 있다. 일반 차량을 대상으로 경찰차가 낸 교통사고 건수는 2006년 1216건에서 2007년 1352건, 2008년 1733건으로 매년 증가했다. 지난해에도 7월까지 하루 평균 5.2건(총 1116건)의 사고를 냈다. 특히 가해자의 과실이 큰 10대 중과실 사고로 분류되는 신호위반 사고도 41건에 달했다. 시민과 만나는 최일선에 있는 법의 수호자들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법을 대한 것이다.

보수 진영에서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가 먹을거리 안전에 대한 우려 표시가 아니라 물리력에 기댄 대선 불복종 운동으로 법치에 대한 근본적 도전의 혐의가 짙다고 보고 있다.

■ 가녀린 법치의 뿌리

한국인의 법에 대한 경시 풍조는 새로운 게 아니다.

일제강점기와 권위주의 정부 시절 법은 ‘시민의 보호막’이 아니라 ‘억압의 도구’였다. 법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정의’였다. 당시의 법치주의는 ‘정치권력이 법에 따라 권한을 행사하고 법에 의해 통제받겠다’는 본래적 의미가 아니라 ‘법이라는 수단으로 국민을 통제하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법이 사랑받고 신뢰받고 존중받을 만한 전통이 충분치 않은 것.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진행되면서부터 법치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가녀린 법치주의의 뿌리는 2008년 촛불시위로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시위대는 “법치주의는 시민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을 앞세워 실정법을 무시했다. 여기다 법질서를 수호해야 할 대통령은 ‘뼈저린 반성’이란 표현까지 써 가며 국민에게 사과했다.

대다수 법학자들은 이제 한국에서는 △절차적 민주화가 이뤄졌고 △합법적 권력교체가 이뤄질 뿐 아니라 △시민의 권리구제도 법 절차에 따라 가능해졌기 때문에 ‘저항권’을 인정할 만한 정치·사회적 상황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서울대 최대권 명예교수(법학)는 “한국의 헌법은 다수정당이 소수의 의견을 외면하고 입법을 추진하더라도 위헌법률심사 제도를 통해 소수자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실질적 법치주의의 단계에 들어섰다”며 “현행 헌법의 정당성에 동의한다면 저항권을 인정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 ‘법의 지배’ 재건하려면

법치주의는 성숙사회, 선진사회의 중요한 지표다.

글로벌 기업들은 법의 지배를 해외 투자 결정의 중요한 변수로 삼고 있다. 법치주의가 안정적으로 작동해야 투자에 대한 대가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법학자는 “민주화된 지가 20년이 넘는 상황에서 저항권이 거론되고 있는 것은 법을 집행하는 현 정부 인사들의 윤리 문제, 가진 자에 대한 특혜라는 인상을 주는 정책 등이 잇따라 터져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 이귀남 법무부 장관, 김준규 검찰총장의 인사청문회에서 어김없이 등장했던 위장전입과 다운계약서 등 실정법 위반, 그리고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이 무리하게 전 정권 인사들을 수사했다는 인상을 받은 상당수 국민은 ‘법과 그 집행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문재완 교수는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정부 아래에서 민간인 불법사찰이 이뤄지고, 대통령의 특별사면권이 남용되는 것도 정부 스스로 법치주의의 근간을 허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와 함께 법원 판결을 거부하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원 명단을 공개한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의 행동에서 볼 수 있듯 여권이 한편으로는 ‘법치주의’를 이야기하면서도, 자기에게 필요할 때에는 ‘법의 지배(rule of law)’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도 법이 위엄을 잃는 요인이 됐다. 어렵게 뿌리내리기 시작한 법치주의가 한국에서 꽃피기 위해선 보수와 진보, 그리고 사회 지도층이 스스로에게 엄격한 도덕률을 적용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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