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권재현 ‘트랜스크리틱’] ‘동이’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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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1일 17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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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훈PD(왼쪽)와 동이 역의 탤런트 한효주. 스포츠동아 자료사진
이병훈PD(왼쪽)와 동이 역의 탤런트 한효주. 스포츠동아 자료사진


조선 영조의 어머니를 극화한 드라마 '동이'가 이병훈 표 흥행공식에 따라 순항 중입니다. 이병훈 PD가 연출했던 '허준' '대장금' '이산'처럼 처음엔 뜨뜻미지근하지만 한번 끓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이 달아오른다고 '가마솥 시청률'이란 표현도 등장했습니다. 시청률 조사기관 TNS의 자료로는 동이(한효주 분)가 장옥정(이소연) 측의 음모에 빠져 사경을 헤매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8, 9일 방송분의 시청률이 처음으로 30%를 돌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때문에 '동이'가 이병훈 PD의 전작과 같은 패턴을 밟을 것이란 전망과, 전작과 너무 비슷한 서사구조가 이제는 식상해 예전만 못하리라는 전망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확실히 이병훈 표 사극은 동어반복의 구조를 지녔습니다. 주인공이 태생의 한계와 주변의 편견으로 혹독한 초년고생을 겪지만 자신의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장인정신을 발휘한 끝에 고진감래의 영광을 안는다는 동일한 서사구조를 지녔습니다. 드라마에 따라 시대적 배경과 성, 신분, 직업만 다를 뿐 그 주인공은 본질적으로 동일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천편일률적이란 비판이 발생합니다. 궁중암투 중심의 TV사극문법에선 벗어났을지 몰라도 초년고생 끝에 말년 영화를 누리는 영웅설화구조에 권선징악의 교훈적 주제를 결합한 고대소설로 회귀했다는 지적입니다.

이런 비판엔 절반의 진실만 담겼습니다. 바로 그 끊임없는 반복이 이병훈 사극의 한계인 동시에 매력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극 속 주인공들은 그리스신화 속 시지포스를 닮았습니다. 혼신의 노력으로 정상 가까이 올려놓은 바위덩어리가 다시 떨어지면 또 밀어올리기를 반복하는 시지포스처럼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미련할 정도로 되풀이합니다. 포기를 모르는 그 집념은 강박관념에 가깝습니다. 동이가 궁중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를 감사하라는 '미션 임파서블'을 부여받은 뒤 온갖 구박과 모멸, 구타를 당하면서도 포기할 줄 모르는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조선 영조의 어머니의 삶을 극화한 드라마 ‘동이’(한효주). 사진 제공 MBC
조선 영조의 어머니의 삶을 극화한 드라마 ‘동이’(한효주). 사진 제공 MBC


그런 모습은 근대과학의 동력이 됐던 영구기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번 돌아가기 시작하면 멈출 줄 모르는 기계. 그렇습니다. 이병훈 사극은 겉으론 고대소설의 서사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되풀이 해 출몰하는 주인공은 그런 '영구기관의 꿈'을 무의식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근대적 존재입니다. 이병훈 사극의 주인공들이 다른 등장인물과 그토록 이질적인 이유도 거기서 발생합니다. 여러분이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갔다면 아마도 주변 인물들로부터 장금이나 송연이('이산'의 여주인공), 동이가 받았던 것과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남들은 다 가만히 있는데 왜 너만 그렇게 튀냐."

과거와 현재의 시대착오적 충돌, 그 끊임없는 불화야말로 이병훈 사극의 진짜 매력입니다. 여기서 과거를 구현하는 것이 사극이라는 형식 내지 고전소설의 전형적 서사구조라면 현재를 구현하는 것은 그 형식과 구조를 채우는 인물입니다. 이런 형식과 내용의 충돌과 불화가 겨냥한 것은 결코 조선시대가 아닙니다. 그 시대에 배태되거나 배양된 병폐를 물려받은 오늘입니다. 드라마 속의 장금이와 동이, 허준과 송연은 바로 우리사회의 뿌리 깊은 병폐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 대신 그 병의 근원과 싸우는 존재입니다. 그들 대부분이 병을 고치는 의학지식에 정통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감찰 궁녀인 동이는 온갖 구타와 구박, 모멸을 당하면서도 포기할 줄을 모른다. 사진 제공 MBC
감찰 궁녀인 동이는 온갖 구타와 구박, 모멸을 당하면서도 포기할 줄을 모른다. 사진 제공 MBC


이런 심층구조를 염두에 두고 드라마를 보다 보면 묘한 역전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드라마 속 악인들은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해 제거하려 했던 주인공이 끈덕지게 살아 돌아오는 것을 항상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 눈빛에는 유령이나 강시(좀비)를 봤을 때의 공포가 담겼습니다. 이는 매우 적절한 반응입니다. 주인공들은 바로 미래의 우리를 구하기 위해 파견된 '터미네이터'와 다를 바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드라마 밖에선 우리의 대리자인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인이 바로 죽어도 죽지 않은 유령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병훈 사극의 동어반복적 형식과 내용이 용납될 수 있는 미학적, 윤리적 토대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동이'에선 이런 토대를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퇴행현상을 곳곳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드라마 곳곳에서 동이가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갈 운명을 타고 났다는 전근대적 운명론이 횡행합니다. 마땅히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가야하는 동이가 조선의 국모가 될 천운을 타고났다는 관상쟁이의 예언을 따라 춤추는 꼭두각시 마냥 그려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마치 '천재소년 두기'와 '맥가이버'를 합쳐놓은 듯 모르는 게 없는 척척박사에, 순발력 넘치는 만능 해결사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병훈 사극의 주인공이 지닌 근대적 주체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퇴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과거의 시간 속을 떠돈 탓일까요. 한때 허준이었고, 장금이었고, 송연이었던 동이는 우리를 대신해서 과거의 구태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 채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전근대적 잠꼬대에 취해가고 있습니다. 지금 동이에겐 '아 윌 비 백'을 외치며 용광로 속으로 기꺼이 들어갔던 터미네이터의 불굴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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