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박지하]더 이상 기계가 두렵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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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6일 15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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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영화 '2012'는 인류멸망을 앞두고 온갖 자연재해를 총동원했다.

같은 감독이 만들어 마치 2012의 전작처럼 느껴지는 영화 '투모로우'(2004)는 갑작스러운 기상이변으로 위험에 처한 인류가 주인공 아닌 주인공이다. '일본침몰'에서는 지구온난화로 일본 열도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괴물'에선 한강에 방류된 독극물 때문에 괴물이 되어버린 괴생명체가 서울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최근작 '해운대'는 부산에 사상 최악의 쓰나미가 몰려온다는 설정이다. 모두가 무시무시한 자연 재해를 다루고 있다.

21세기의 SF 히트작들에서 인간은 자연 재해를 피해 도망 다니기에 바쁜 처량한 존재일 뿐이다. 21세기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이 자연재해라는 것은, 어쩌면 20세기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영화 ‘2012’. 고대 마야 문명에서부터 끊임없이 회자되어 온 인류 멸망. 2012년, 저명한 과학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실제로 멸망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각국 정부에 이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 곧 고대인들의 예언대로 전세계 곳곳에서는 지진, 화산폭발, 거대한 해일 등 각종 자연 재해들이 
발생한다. 두 아이와 함께 가족 여행을 즐기던 잭슨 커티스(존 쿠삭)는 인류 멸망을 대비하기 위해 진행해 오던 정부의 비밀 계획을 알게 되고 
가족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영화 ‘2012’. 고대 마야 문명에서부터 끊임없이 회자되어 온 인류 멸망. 2012년, 저명한 과학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실제로 멸망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각국 정부에 이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 곧 고대인들의 예언대로 전세계 곳곳에서는 지진, 화산폭발, 거대한 해일 등 각종 자연 재해들이 발생한다. 두 아이와 함께 가족 여행을 즐기던 잭슨 커티스(존 쿠삭)는 인류 멸망을 대비하기 위해 진행해 오던 정부의 비밀 계획을 알게 되고 가족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자연재해가 사상 최대의 공포?

20세기의 SF 명작들은 자연이 아닌 기계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기계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갖추고 더 이상 인간의 말을 듣지 않는 세계, 더 나아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암울한 세계를 주로 다뤘다.

1982년작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인간을 본 따 만든 사이보그가 감정까지 가지게 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1987년작 '로보캅'에서는 인간이 로보트로 다시 태어난다.

기계와 인간의 구분이 모호한 이런 이야기들은 인간성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계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인간성이란 그렇게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감을 내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기계가 단순한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의 차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1999년 세기말에 탄생한 걸작 '매트릭스'는 기계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을 완전히 통제하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네오가 현실을 직시하고 보니 그동안 인간들이 각종 기계를 사용하면서 살아오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고 현실은 거대한 기계가 짜놓은 매트릭스 속의 세상일뿐이었다.

영화 ‘매트릭스’. 2199년 인공 두뇌를 가진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가축처럼 인공 자궁에서 재배돼 기계 세상의 에너지원으로 사용된다. 뇌세포에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입력당한 인간은, 프로그램에 따라 평생 1999년의 가상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사진은 인류의 구세주 네오 역할을 
받은 키애누 리브스.
영화 ‘매트릭스’. 2199년 인공 두뇌를 가진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가축처럼 인공 자궁에서 재배돼 기계 세상의 에너지원으로 사용된다. 뇌세포에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입력당한 인간은, 프로그램에 따라 평생 1999년의 가상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사진은 인류의 구세주 네오 역할을 받은 키애누 리브스.


현실을 직시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뛰쳐나왔던 그 매트릭스가 제공하는 안락함 속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동료들을 팔아넘기는 사이퍼의 모습은 인간의 나약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매트릭스는 완전히 기계에 예속된 인간들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주인공 해리슨 포드가 사이보그인 레이첼을 구해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었다면, '매트릭스'의 네오는 무늬만 인간인 스미스에게 쫓기는 처지이다. 끊임없는 자기 복제가 가능한 스미스는 너무나 강력하다. 기계 스미스의 공격에서 인간 네오가 살아남는 길은 매트릭스의 세상이 기계의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20세기의 공포는 기계의 인간 지배

매트릭스에서 문제는 이제 기계를 어떻게 프로그래밍할 것인가가 아니라, 인간이 기계의 프로그래밍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로 바뀌었다. 네오가 구해야 하는 것은 인간과 다를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는 기계들이 아니다. 자신들이 기계에 의해 사육되고 있는 줄도 모르는 다른 인간들이다.

영화가 예견했던 우울한 21세기는 다행히 오지 않았다. 지구상의 모든 컴퓨터가 먹통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던 Y2K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휴거가 일어나지도 않았고, 2000년 1월 1일의 해도 1999년 12월 31일과 다름없이 떠올랐다. 2001년에도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일은 현실화 되지 않았다. 아마 2020년이 되어도 어린 시절에 보았던 만화영화 '2020 원더키디'의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이란에서는 거대한 지진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고, 동남아에 쓰나미가 닥쳐왔다. 지구촌 곳곳에서 3월에도 폭설이 내리곤 했다.

이제 스스로 생각할줄 알게 된 기계가 인간을 벌한다는 이야기 따위는 그리 무섭지 않다. 20세기 말 기계에 대한 공포는 기후변화에 대한 공포로 바뀌었다.

21세기는 자연이 인간을 벌한다. 이 재난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과학자라고 해도 급습해오는 추위 앞에서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릴 수밖에 없다. 기계는 총질을 해서 공격을 멈추게 하거나 최소한 늦출 수 있었지만, 파도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인류에게 문명의 지혜를 가르쳐 준 검은 돌기둥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디스커버리호는 목성을 향해서 날아간다. 하지만 우주선 컴퓨터 할이 발란을 
일으키고 선장 보우만(케어 둘리아 분)과 승무원 풀(게리 룩우드 분)은 위기에 봉착한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인류에게 문명의 지혜를 가르쳐 준 검은 돌기둥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디스커버리호는 목성을 향해서 날아간다. 하지만 우주선 컴퓨터 할이 발란을 일으키고 선장 보우만(케어 둘리아 분)과 승무원 풀(게리 룩우드 분)은 위기에 봉착한다.


환경에 대한 높은 인식의 발로일까?

자연 재해를 다룬 영화들이 줄줄이 나오는 이유가 영화계 사람들의 환경의식이 높아졌거나, 그들이 용감히 떨쳐 일어나 '불편한 진실'을 말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기계는 예상보다 빨리 발명되지 않았지만 기후변화는 우리 주변에 바짝 다가왔다.

정말이지 처음 온실가스와 오존층 구멍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내가 늙기도 전에 지구 온난화를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보게 될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장마철이 사라지고 동남아 국가들처럼 우기가 생기는 것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기계에 의한 디스토피아에는 명백한 적이 있고 그것을 파괴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인간 대 기계의 구도에서 인간은 인간끼리 똘똘 뭉쳐 적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 인간 대 자연의 구도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인간은 기계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21세기 재난영화의 주인공들은 인간들끼리 싸우거나 끊임없이 도망 다닐 뿐이다.

자연의 공포는 대결구도를 감히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의 대반격은 그 원인도 해법도 자연이 아닌 인간들 내부에 있다. 환경의 역습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무엇을 파괴하고 있는지 정신 똑바로 차리는 수밖에 없다.

박지하 / 칼럼니스트 jihapar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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