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김재완]외국인도 10분 배우면 읽는 한글

  • 입력 2009년 10월 8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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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과학원은 세종대왕의 집현전처럼 순수기초과학 이론연구를 하는 기관이다. 해마다 수학 이론물리학 계산과학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수백 명이 다녀간다. 학자답게 한국의 문화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이분들에게 자랑스러운 우리 한글을 소개하기 위해 한글 읽는 방법을 담은 1면짜리 자료를 만들어서 몇 년째 쓴다.

나는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비행기 안에서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연습하고 중국행 비행기 안에서는 간자체를 연습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이해는 못하더라도 일단 읽을 수만 있어도 여행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 한국을 찾는 외국인 학자를 위해 한글 자료를 만들었다. 우리말을 모르지만 단 10∼20분이라도 배워서 한글을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다는 데에 그들도 놀라지만, 자료를 만든 나 자신도 외국인이 한글을 쉽게 배울 수 있다는 데에 새삼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서양의 알파벳은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지만 나라에 따라, 경우에 따라 발음이 제각각이다. 영어의 P는 피읖 소리가 나지만, 그리스나 러시아의 P는 리을 소리가 난다. 한글 자음은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기에 쉽게 외울 수 있다. 다른 나라나 문화권에서 한글을 채용해도 소릿값이 아주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이 자신들의 언어를 기록할 글로 한글을 채택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소릿값을 제대로 보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한글 모음이 천지인을 형상화했다고 설명하면서 우리 역사와 철학을 소개한다. 모음의 소릿값은 아무래도 기억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나름대로 쉽게 외우는 방법을 만들었다. ‘ㅗ’는 ‘줄 위에(over) 점’, ‘ㅜ’는 ‘줄 밑에(under) 점’ 하는 식으로 소릿값을 기억하게 한다. 이런 식으로 한글을 배운 미국인 과학자 1명은 고등과학원을 두 번째로 방문할 때에 길거리 간판을 읽고, 세 번째 방문할 때에는 쓰기까지 하여 나를 감탄시켰다.

한글의 과학성에 대해 시비할 사람은 없겠지만 우리말은 어떨까. 기호수학을 전공하는 수학교수 한 분이 우리말이 너무나 비과학적이라고 한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연구를 하면 한글 못지않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컴퓨터 프린터에 많이 쓰는 포스트스크립터라는 프로그램언어가 있다. 문법이 우리말 문법과 매우 비슷하여 우리말도 고급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로 개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한글과 우리말의 과학성이 돋보이지만 정보과학적인 연구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문화권에 속한 나라의 공통적인 문제인데 동음이의어가 너무 많아 정확한 의사소통을 방해한다. ‘양자’라고 하면 양자물리학 양자회담 양자입양처럼 문맥으로 미뤄 이해할 수 있는 예도 있지만 스포츠 기사에 나오는 ‘연패’ 앞에서는 항상 멈칫한다. 중고교용 한자에서 ‘기’에 해당하는 한자는 스무 자가 넘는다. 한글로 만들 수 있는 음절의 수가 이론적으로는 1만 자가 넘지만 현실적으로 쓰이는 한글 음절의 수는 2000∼3000자 수준이다. 순우리말에 사용하는 ㅈ ㅊ ㅌ ㅍ 같은 받침을 외래어에는 금지하고 겨우 ㄱ ㄴ ㄹ ㅁ ㅂ ㅅ ㅇ 등 일곱 개의 받침만 허용해 한글표현의 다양성을 제한한다.

정보통신기계의 한글 자판과 문서작성기 표준화 문제에서도 우리글 관련 기술을 외국에 떠넘기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 한글의 주권을 외국에 빼앗기지 않는다는 법도 없다. 한글이 과학적으로 뛰어나다고 자만하지 말고 우리말과 글을 제대로 발전시킬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김재완 고등과학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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