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윤종구]일본 칠드런과 한국 탄돌이

  • 입력 2009년 9월 7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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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만의 정권교체를 낳은 일본 총선이 끝났다. 난타전이 지나간 자리에 결국 남는 것은 승자와 패자다. 승자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무리는 ‘오자와 칠드런’이다. 민주당의 역사적 대승을 주도한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대표대행의 영향력 덕분에 처음으로 의원 배지를 달게 된 당선자를 일컫는 말이다. 어림잡아 100명이 넘는다. 이들은 자신을 정계에 입문시키고 공천을 줘서 선거 지원까지 아끼지 않은 오자와를 정치적 주군으로 모실 것이다. 오자와 칠드런은 향후 민주당 정권에서 오자와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정치기반이 될 게 틀림없다. 오자와는 이미 정치권 최대 세력으로 우뚝 섰다.

오자와 칠드런이 대거 배출된 원인은 당선자 개개인의 경쟁력이나 민주당의 공약이라기보다는 자민당의 54년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분노 때문이다. 선거기간 내내 ‘바꿔 열풍’은 일본열도 전체에 휘몰아쳤다. 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두고 연고도 없는 지역에 낙하산 투입된 30, 40대 신인들이 지역구에서 수십 년 터를 닦고 장관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친 자민당 거물을 잇달아 꺾었다. 정책도 정견도 인물도 판단 기준이 아니었다. ‘미녀 공천’ ‘자객 투입’이란 말까지 나오는 이들 선거구의 공통점은 ‘바꿔 열풍’이 승패를 갈랐다는 점이다.

이에 앞서 2005년 총선 때는 ‘고이즈미 칠드런’이 선거판을 달궜다. 당시 우정민영화 개혁을 기치로 내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자민당이 압승했다. 고이즈미는 자신의 노선에 반기를 든 의원들을 축출하고 그들의 지역구에 ‘자객’을 투입해 철저히 응징했다. ‘미녀 자객’의 원조다. 이렇게 해서 의회에 입성한 고이즈미 칠드런은 83명이었다. 고이즈미가 연출 감독 주연을 도맡았다는 뜻에서, 2005년 총선은 ‘고이즈미 극장’에서의 ‘고이즈미 매직’이라고 불린다. 이후 고이즈미 칠드런은 그의 정치적 수족이 돼 고이즈미 내각을 떠받쳤다. 불과 4년이 지난 올해 총선에서 그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들은 유권자에게 고이즈미 개혁의 ‘개’자도 입에 올리지 못한 채 칠드런이란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고이즈미 개혁이 일본의 양극화 심화현상의 주범으로 인식되면서 역풍이 분 탓이다. 바람으로 일어섰다가 바람으로 쓰러진 셈이다.

한국엔 탄돌이가 있었다. 2004년 4·15총선 때의 일이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열린우리당의 정치초년병 108명이 국회에 진입했다. 상당수는 공천을 받을 때만 해도 진짜 당선되리라곤 꿈도 못 꿨지만 이후 터진 탄핵을 계기로 대거 배지를 달았다. 개개인의 정치적 자질은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았다. 이들은 당선 후 노무현 정권을 떠받치고 추종하는 선봉대 역할에 몸을 던졌다. 역시 이들도 오래가지 못했다. 2008년 총선에서 탄돌이는 고이즈미 칠드런과 마찬가지로 유세현장에서 노무현 정치의 ‘노’자도 꺼내지 못했다.

고이즈미 칠드런과 탄돌이가 단명으로 끝난 것은,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외부의 바람에 편승해 배지를 손쉽게 달았기 때문이다. 민심을 헤아리기보다는 주군의 나팔수 노릇을 자처한 당선 이후의 여정도 비슷했다. 이성보다 감성과 바람이 지배하는 선거판이라지만 국민의 눈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고이즈미 칠드런과 탄돌이를 잣대로 오자와 칠드런의 앞날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훈은 충분히 될 수 있다. 남의 나라이긴 하지만, 오자와 칠드런은 선배들의 전철을 밟지 않길 바란다.

윤종구 도쿄 특파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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