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최영훈]불편한 진실

  • 입력 2009년 8월 19일 02시 56분


2000년 미국은 대통령 선거 열기로 달아올랐다. 미국 언론은 앨 고어 후보를 완고하고 재미없는 사람으로 그렸다. 지적 능력은 뛰어나지만 비사교적이어서 환영받지 못했다. 그는 조지 W 부시 후보에게 득표엔 앞섰으나 선거인단 수에 밀렸다. 플로리다 주 일부의 검표를 다시 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고어는 연방대법원의 중지 결정에 승복하고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환경운동에 헌신하는 앨 고어

그즈음 기자는 미국에서 1년간 연수를 했다. 낙선 직후 그의 체중이 갑자기 불고 우울증까지 생겼다는 가십기사를 본 일도 있다. 그는 9·11 테러 때 언론에 잠시 등장했다 이내 사라졌다. 과문한 탓으로 그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녹색 대장정’에 뛰어든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귀국 후 몇 년이 지나서였다. 2005년 지구는 사상 최고로 뜨거웠다. 세계의 빙하지대가 녹아내린 그해 여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를 강타했다. 뉴올리언스 시가 물에 잠기고 많은 곳이 초토화됐다. 이때 고어는 구조헬기를 급파해 200명이 넘는 이재민을 구해냈다.

그는 지구 온난화의 위험을 경고하는 강연만 1000회 넘게 했다. 그 결실로 2006년 다큐멘터리 영화 ‘불편한 진실’이 탄생했다. 그 반향은 매우 컸다.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그는 동명의 책까지 펴냈다. 환경파괴의 심각성을 실감나게 알려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이듬해 유엔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와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버드대에 다닐 때부터 환경운동에 헌신한 그는 ‘에코 리더십’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저탄소 녹색성장’을 중장기 국가발전 방안으로 선포했다. 최근에도 “녹색성장은 가야만 하는 길이고 또한 성공해야 하는 길이다”라고 거듭 다짐했다. 지난 1년간 각 부처에서 녹색성장이라는 이름을 붙인 정책만 수백 가지가 쏟아져 나왔다. 방향은 맞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무늬만 녹색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녹색성장기본법의 국회 통과도 난기류에 싸여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17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아시아·아프리카 지역 대학총장포럼’에서 되새겨볼 만한 화두를 던졌다. “(녹색성장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선) ‘위에서 아래로(Up-Down)’와 ‘아래서 위로(Bottom-Up)’의 압력이 동시에 필요하다.” 반 총장은 이 자리에서 정부와 대학사회의 쌍방향 역할을 강조했다. 맞는 처방이다. 거대담론에만 골몰하고 녹색산업에만 치중해선 답이 없다. 철학이 없는 녹색성장은 공허하고 탄력을 받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에코 리더십’ 청소년에 교육을

하나뿐인 지구가 환경파괴와 온난화로 신음하고 있다. 지금 당장 생활과 소비 행태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에코 리더십’을 깨쳐 실천하는 청소년을 많이 길러내야 한다. 그러려면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돌보는 데 많은 기여를 하는 여성들의 참여가 절실하다. 동아일보는 15년 전 그린스카우트를 앞세운 친환경 캠페인을 1년 넘게 한 일이 있다. 민간에서부터 이같이 자발적인 녹색생활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녹색애국에는 남녀노소나 좌우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이 대통령도 최근 라디오연설에서 녹색생활을 화두로 던지긴 했다. 그러나 민간에서 반향이 없다. 정부가 마중물을 부어야 할 것 같다. 예를 들어 교육과학기술부라면 녹색실천을 잘하는 학생에게 녹색마일리지를 줄 수 있다. 이같이 앞장서서 잘하는 단체와 개인에게 인센티브를 주거나 또 다른 격려로 녹색실천을 장려하는 정부의 부드러운 개입은 필요하다. ‘불편한 진실’을 강 건너 불 보듯 외면하면 뼈아픈 후과(後果)를 치를 수밖에 없다. 정말 시간이 없다.

최영훈 편집국 부국장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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