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연욱]판을 더 흔들어야 한다

  • 입력 2009년 8월 18일 20시 24분


“이젠 시골에 내려가야지. 우리가 할 일을 여권이 다 해버렸는데 그렇다고 여권을 지지한다고 할 수도 없고….”

김영삼(YS) 정부 초반 한 야당 정치인 A 씨의 푸념이었다. 정권 초인 1993년부터 공직자 재산공개를 시작으로 개혁의 물길이 거침없이 휘몰아치자 야당의 무력감을 토로한 것이다.

물론 YS 정권이 추진한 공직자 사정의 배경엔 정치적 노림수가 없지 않았다는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민자당 대선후보 선출 과정에서 YS 민주계와 민정계 사이에 쌓인 앙금이 불씨가 됐다는 얘기다. 실제 민정계 중진들이 공직자 재산공개의 화살을 맞고 낙마(落馬)했다. 재산 형성의 문제점을 도외시한 채 단순히 재산이 많다는 이유로 고위공직자들이 옷을 벗어야 했던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정치권과 공직사회를 겨냥한 YS 정부의 승부수는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계파 간 이해관계를 떠나 집권세력이 먼저 제 살을 도려내는 개혁의 카드를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야당도 마냥 버틸 수 없어 재산공개의 흐름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호남출신의 한 대학교수는 “광주 등 호남지역에서 당시 YS 정부에 대한 지지는 대단했다”고 회고했다.

격랑의 물결이 흘러간 지 10여 년. 이제 국회의원 총선 출마자들은 입후보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은 물론이고 전과, 병역기록까지 공개해 유권자들의 사전 검증을 받아야 한다. 고위직을 노리는 많은 공직자는 미리 주변 정리에 나서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당시 야당의 고충을 토로한 정치인 A 씨는 이 같은 미래상을 미리 내다보지 않았을까.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제64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지역감정 해소와 생산적인 정치문화를 이루기 위한 선거제도 개혁 등 정치개혁의 깃발을 내걸었다. 청와대는 “대통령은 ‘우리 희생 없이 뭔가를 개선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이 던진 ‘희생’의 화두는 제 살을 도려내서라도 정치개혁을 이루겠다는 진정성을 강조하려는 메시지다.

하지만 벌써 한나라당 내 일부에선 이 대통령의 발언에 선을 긋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특히 한나라당이 강세인 영남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다소 불리한 중·대선거구제 문제는 논의대상이 아니다”라는 강경한 반응이 흘러나오고 있다. 유·불리를 따져 소선거구제의 골격을 살려놓은 채 일부 보완책만 논의할 수 있다는 식이다. 이럴 경우 이 대통령이 언급한 ‘희생’은 자칫 말잔치에 그칠 수 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정치개혁의 핵심은 중·대선거구제 개편”이라며 한나라당을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당내에선 선거구제 개편을 통해 국회 의석수를 더 늘리겠다는 정치적 계산이 번득이고 있다. 정치개혁의 대의를 외치면서도 그 진정성의 빛은 바래지는 느낌이다.

정세균 대표가 최근 호남인사 차별론을 끄집어낸 배경에 호남 텃밭을 지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많다. 같은 당 조경태 의원(부산 사하을)은 “당 3역을 모두 호남출신이 독식하지 않았느냐”고 정 대표를 정면 비판했다.

로마의 제정을 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내전기)라고 갈파했다.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매달릴 때 정치개혁의 길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해관계의 타산 속에선 정치개혁의 진정성을 찾기 힘들다. 판을 더 흔들어 이해관계의 틀을 깨야 한다. 국민들은 ‘감동의 정치’를 바라고 있다.

정연욱 정치부 차장 jyw11@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