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몽골초원에서 배우다

  • 입력 2009년 8월 14일 19시 35분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국립도서관의 한국인 사서 김희근 씨(26·여)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몽골에 파견한 봉사단원 61명 가운데 한 명이다. 국립도서관이라지만 디지털화가 안돼 있다 보니 책 먼지가 자욱해 들어서자마자 기침이 쏟아진다.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문헌 정리에 땀을 흘리고 있다. 그는 “돌아갈 때가 됐는데 이곳 사정을 보면 발길이 안 떨어져요”라며 2년 6개월의 봉사기간을 인생의 새로운 전기로 삼아 도약하겠다고 말한다.

대기업 취업에 목매는 청년들

한국의 대다수 청년들은 김 씨와는 다른 고민을 한다. 좋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대학 졸업을 미루고 취직시험에 목을 맨다. 국내 취업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지금의 심각한 청년실업은 뿌리 깊은 구조적 문제에 불경기가 겹쳐 더 악화됐다. 대학진학률이 83%나 되는 상황에서 대학졸업자가 쏟아져 나오는데 성장 동력이 떨어져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는다. 일자리의 질도 떨어져 비정규직 취업 청년들의 좌절감도 크다. 선진국도 고용사정이 좋은 것은 아니다. 선진국은 경제성장률이 낮아 자국 실업자를 구제하기 힘들다. 우리나라가 되레 영어권 국가 청년실업을 상당 부분 해소해주고 있다. 얼마 전 로이터통신이 “한국 가서 영어강사 하면 떼돈 번다”고 보도한 것이 그런 맥락이다.

이 폭염에 대학도서관에서 취직공부에 몰두하는 청춘들의 얼굴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찌들어 있다. 반면에 몽골에서 만난 봉사대원들은 고생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얼굴만은 자부심과 긍지로 빛났다. 그중에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차선책으로 봉사대원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지만 ‘봉사하는 삶’을 통해 인생관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봉사의 힘은 그런 것이다. 암에 걸린 한 시니어(노인) 단원은 “죽기 전에 좋은 일 한번 해보자”며 봉사활동에 참여한 뒤 귀국했다. 그 뒤 암세포가 기적처럼 사라졌다. 믿기 어렵지만 실화이다.

자원봉사는 개도국과 선진국을 가르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당선 직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을 위해 미국인은 자원봉사에 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취임식 전날도 워싱턴 노숙자 쉼터에서 페인트칠을 하는 자원봉사를 했다. 그가 늘 “엘리트 젊은이들은 월가의 탐욕스러운 삶에 안주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도 대가 없이 일하는 자원봉사가 미국을 재건할 것이라는 믿음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오바마도 월가의 다국적 회사를 박차고 나와 시카고에서 빈민 운동을 했다.

제3세계 봉사에 기회 있다

한국의 대외원조 실적은 경제규모에 비해 아직도 부족하지만 우리에겐 뛰어난 현지전략과 우수한 인력이 있다. 일본은 도로 건설 등 큰 프로젝트를 곧잘 벌이지만 한국은 현지인에게 가장 적합한 사업을 제공하는 맞춤형 프로젝트로 효과를 발휘한다. 이곳 울란바토르 시내 국립도서관 하타긴 고아킴 관장은 “많은 나라의 봉사단원들이 몽골에서 고아를 돌봐준다. 한국인은 다르다. 그들은 우리가 머리를 쓰도록 만들어 준다”고 말했다. 가슴 뿌듯한 말이다.

“나도 미래가 불안하긴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나로 인해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람이 한 명만 늘어도 내 청춘은 허망하지 않을 겁니다.” 몽골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 봉사대원의 말이다. 젊은 날 제3세계 체류 및 봉사 경험은 이들에게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음을 몽골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학도서관에 틀어박혀 토익 책을 파는 청년들도 가끔 눈을 들어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말을 달리는 몽골 초원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울란바토르에서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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