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감세 논쟁으로 잃은 것들

  • 입력 2009년 7월 20일 02시 56분


글로벌 경제위기라는 폭풍우 속에서 우리 경제가 이나마 버티는 것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끄는 정부 경제팀의 기민한 대응 덕분이다. 경제시스템 붕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은 것만으로도 경제팀은 칭찬받을 만하다. 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대규모 추가경정예산을 짜고, 선진국들을 능가하는 폭과 속도로 재정지출을 늘려 얼어붙은 실물경제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임시직일망정 6월 취업자가 늘고 기업들이 도산 도미노 공포에서 한숨 돌린 것은 선제적이고 과단성 있는 재정정책의 공로다. 윤 장관이 ‘한국 경제호(號)’의 선장을 맡은 2월 초와 지금의 경제상황을 비교해 봐도 경제팀의 성적표에 인색할 이유는 없다.

우리 경제가 기운을 추스르게 된 데는 윤 장관이 정책의 일관성과 정부의 정직성을 강조한 것도 큰 몫을 했다. 그가 2월 10일 취임하자마자 경제주체들을 향해 던진 첫 번째 메시지는 올해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고백이었다. 그러면서 “정부가 신뢰를 회복하는 첫걸음은 정부의 정직성에 있다”고 강조했다.

실무자들은 정부의 암울한 전망이 금융시장을 패닉에 빠뜨릴지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여론은 경제팀장의 솔직함에 오히려 박수를 보냈다. 1기 경제팀이 시장의 불신으로 고전했던 것과 달리 2기 경제팀이 순항한 것은 시장과의 소통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일관성과 정직성은 윤증현 경제팀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내야 할 핵심가치이자 경쟁력의 원천이다.

경제가 최악의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에 도취된 탓일까. 몇몇 정책을 둘러싸고 원칙에서 벗어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요즘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감세(減稅) 논쟁은 단순히 세금을 더 걷고 덜 걷는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정부의 간섭과 역할을 줄이는 대신 민간의 창의력에서 경제의 활로를 찾고 성장잠재력을 키우겠다는 MB노믹스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다. 이명박 정부가 슬로건으로 내건 ‘작은 정부, 큰 시장’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윤 장관은 지난달 말 국회에서 감세조치를 유보하는 방안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이달 들어서는 정책의 가변성을 거론하며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성역은 없다”고도 했다. 세금정책의 전환을 예고하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발언이다.

나라살림을 꾸려가야 하는 처지에서는 위기극복 과정에서 취약해진 재정건전성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일 수 있다. 하지만 일련의 발언으로 정부가 내년에 법인세와 소득세를 예정대로 깎아줄 것인지가 불확실해졌다. 세금 감면을 전제로 투자비를 따지던 기업이라면 계산을 원점에서 다시 해야 할 상황이 됐다. 기업이 전염병만큼이나 싫어한다는 불확실성을 정부가 조장한 셈이다.

정부가 MB노믹스를 관철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사례가 생길 때마다 불확실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공공기관 선진화는 실적을 내놓기가 민망한 수준이고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금산분리) 완화는 소리만 요란했을 뿐 여전히 미완성이다.

며칠 전 윤 장관은 정부가 기업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으니 이제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기업들이 챙길 것만 챙기고 몸을 사린다는 불만은 윤 장관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뜬금없이 불거진 감세 논쟁이 투자를 꺼리는 일부 기업에 핑곗거리를 준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박원재 경제부장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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