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기홍]미국민이 보는 ‘서거 정국’

  • 입력 2009년 6월 8일 02시 49분


‘노무현 전 대통령 현상(現象·phenomenon)’이 외국인의 눈엔 어떻게 비쳤을까.

기자가 알고 지내는 미국인들의 표면적 반응은 ‘놀라우며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어떻게 국가원수를 지낸 분이 자살을 할 수 있느냐’고 놀라고, 이어 한국인들의 반응에 다시 한 번 놀란 것 같다. ‘진지하게 의견을 들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4, 5일 5명을 인터뷰했다. 2명은 민주당 성향의 한반도 전문가이며, 3명은 미국에서 20∼45년 살고 있는 교포 지식인이다.

5명의 의견은 거의 비슷했다. 우선 ‘자살’에 대해 다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롤모델(典範)이 되어야 할 자리에 있는 분이 선택해선 안 되는 일인데, 한국사회는 그런 부분에 관대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검찰과 언론, 현 정권이 죽인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4명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라는 반응을 보였고, 1명은 “검찰과 언론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 있다”고 말했다.

싱크탱크 연구원 A 씨는 이렇게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었던 정치인들이 타살론을 주장하며 현직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던데 그들은 부정부패를 저지른 혐의가 유죄로 인정된 사람들이다. 내 생각엔 노 전 대통령을 벼랑 끝에 서게 만든 건 대통령 몰래 비리를 저지른 주변 사람들이다. 그들의 탐욕이 청빈한 정치를 강조해온 노 전 대통령의 명예를 먹칠했고, 그게 면목 없어서 괴로워했던 것 아닌가. 원인 제공자들이 반성 대신 정치적 호기(好機)를 만난 듯 행동하는데도 한국에선 그런 지적이 없는 것 같다.”

박윤식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성추문 사건 때 언론과 검찰(특별검사)이 얼마나 집요하고 공격적이었는지를 설명했다. 버락 오바마 캠프 외교안보 자문위원이었던 B 씨는 “만약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가족이나 측근이 수백만 달러를 받은 단서가 포착됐다고 하면 연방수사국(FBI)이나 언론이 얼마나 적극성을 띨지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김동석 뉴욕뉴저지유권자센터 소장은 ‘정치보복설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전제하면서도 “미국에서라면 옐로페이퍼들은 요란법석 설익은 정보를 중계하겠지만 유력 언론은 집요하되 항상 한 번 더 걸러서 보도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들 가장 놀라운 일로 지적한 건 여론의 급변이었다. 박윤식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이 조롱의 대상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하루아침에 바뀌었는데 미국에서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C 씨는 “부정부패 사건이라는 사안의 본질이 어떻게 순식간에 변해버릴 수 있느냐”고 말했다.

대형 로펌인 애킨검프의 시니어 파트너인 김석한 변호사는 “외국인들이 지난해 수입 쇠고기 파동에 이어 이번 일을 볼 때 드는 느낌은 한국은 굉장히 이모셔널(emotional)하며 그게 모든 것을 압도하는(overarching) 사회라는 것이다. 이는 투자 리스크를 평가할 때 불안 팩터가 되며 예측 불가능한 사회라는 인상을 준다”고 말했다.

기자는 한국 사회의 표변을 지적하는 미국인들에게 이렇게 답해주고 싶었다. “그보다 훨씬 더 지저분한 일에 연루된 전직 대통령들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사는 데 비해 노 전 대통령은 죽음에 이를 만큼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했다. 상대적으로 훨씬 순수한 것 아닌가. 한국인들은 그런 대목을 특히 가슴 아파하는 것이다.”

추모열기에 담긴 평범한 시민들의 애틋한 마음을 이해한다면 외국인들의 평가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진정성에 편승한 일부 정치·이념세력들의 억지로 순수한 추모 열기마저 “이해하기 힘든 일”로 비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기홍 워싱턴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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