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중현]전염병보다 독한 해외주재원

  • 입력 2009년 5월 20일 02시 58분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한국 제조업체 공장에 코브라가 나타났다. 현지인 직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밖으로 피했지만 관리자인 한국인 주재원은 끝까지 안에 남았다. 한참 지나도 나오지 않자 직원들은 그가 뱀에 물려 죽은 줄 알고 조심스레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한국인 주재원이 불을 피우고 뱀을 굽고 있었던 것이다.

몇 해 전 취재차 방문했던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현지 주재원들로부터 들은 우스개다. 열악한 치안 등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이 놀라운 성과를 낸 이유를 묻자 “한국 주재원들이 다른 나라 주재원보다 독하기 때문”이라며 해준 얘기다.

최근 신종 인플루엔자A(H1N1) 때문에 멕시코에 있는 주재원 가족들이 귀국했다는 뉴스를 보다가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가족들이 돌아온다는데 주재원들은 어떻게 되나 궁금했다. 멕시코에 진출한 삼성전자 LG전자 포스코 등에 확인해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귀국한 주재원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현지 한국 기업들은 영업망 확대에 박차를 가하는 분위기다. 신종 인플루엔자 발병지라는 이유로 이웃 나라들이 항공기 운항을 중단하는 등 수모를 겪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구호물품을 지원해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진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한국 기업 해외 주재원들이 철수 여부를 고민해야 할 대형 위기를 특유의 ‘전투적 기질’로 극복해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기업 브랜드를 각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3년 4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사태가 터졌을 때 중국 베이징에 진출한 서구 선진국과 일본 기업의 주재원들은 철수하거나 영업을 포기했다. 하지만 베이징현대차에 나가 있던 현대차 주재원들은 본사에 “알려진 것만큼 위험하진 않다”고 보고한 뒤 영업을 강화했고, 베이징 시에는 사스 퇴치에 써달라며 차량을 기증했다. 선진국 기업들의 과도한 반응에 불쾌해하던 베이징 시 당국은 고마워했고, 사스 사태가 해결된 뒤 현대차 택시를 대량 구입해 보답했다. 현대차가 지난달 중국에서 월 판매대수 5만 대를 돌파하며 선전한 것도 그 당시 영업망을 확대한 주재원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LG전자는 1997년 브라질법인을 세웠지만 일본 업체들이 시장을 선점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2년 후인 1999년에는 브라질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들어갔다. 2003년까지 이어진 경기침체 기간 중 샤프, 산요 등 일본 업체들은 앞다퉈 브라질에서 탈출했다. 하지만 LG전자 주재원들은 지역밀착형 마케팅을 오히려 대폭 강화했고 ‘엘리제’(LG의 브라질식 발음)는 브라질 국민이 소니, 필립스보다 선호하는 최고의 브랜드로 성장했다.

물론 신종 인플루엔자의 위험을 간과해선 안 된다. 멕시코뿐 아니라 신종 인플루엔자가 확산되는 나라에 해외 주재원을 내보낸 기업과 현지 공관들은 이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며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해외 주재원들이 있기에 세계적 경기침체나 신종 인플루엔자마저 한국 경제에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철수를 검토하라’는 본사의 연락이 올 때마다 ‘지금 나가면 영원히 못 돌아온다’며 무작정 버텼다”던 LG전자 브라질 법인장의 얘기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박중현 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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