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장환수]롯데, 그 찬란한 슬픔

  • 입력 2009년 5월 18일 02시 58분


이 녀석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픈 사랑인 로테(Lotte)와 닮은 게 있다면 상대를 애타게 만든다는 것 하나다. 녀석이라고 함부로 대한 것은 진절머리 나게 말을 안 듣기 때문이다. 철부지 막내가 따로 없다. 프로야구단 롯데 자이언츠 얘기다.

기자는 ‘불행하게도’ 부산 사람이다. 서울에서 두 배 가까이 살았는데도 부산에서 초중고교를 나온 죄로 그리 됐다. 이래선 안 된다고 그토록 다짐을 했지만 대학 기숙사나 하숙집 골방에서 어스름 저녁만 되면 라디오 앞에 앉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녀석의 안타까운 패배를 함께했다. 나중에 기자가 되고 난 뒤 야구 좋아한다고 한마디한 게 창창한 인생을 가르는 비수가 되기도 했다. 물론 영광도 있었다. 최동원이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거둔 해였다. 8년 뒤 19세 염종석이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는 본업이 야구기자인 만큼 내색을 못했다. 그리고 또 17년이 흘렀다.

처음에 녀석은 분노로 다가왔다. 첫 우승 했다고 선수들에게 준 보너스가 달랑 공구세트 하나였다는 얘기도 들렸다. 선수들은 허구한 날 술을 마신다는 괴담도 있었다. 선수 모임 만들려 했다고 천하의 최동원을 삼성에 보냈을 때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녀석을 뼛속 깊이 미워할 수는 없었다. 방학을 이용해 내려간 부산. 발걸음은 어느새 야구장으로 향했다.

무슨 오기라도 생기게 하는 것일까. 큰 점수 차로 뒤진 9회말. 반쯤은 비었을 다른 야구장과는 달리 미동도 없는 3만 관중. 주황색 쓰레기봉투 응원,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부산갈매기. 세계 최대의 노래방이라는 사직야구장은 카타르시스의 현장이다. 기자처럼 심성이 여리거나,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살짝 이슬이 맺히는 순간이다. 어느새 패배에 대한 분노는 눈 녹듯 사라진다. ‘우리는 승패와 상관없는 진정한 팬’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지난해 녀석은 실로 대단했다. 외국인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뒤 ‘가을에도 야구’를 하게 됐다. 그러나 그 외국인 감독은 준플레이오프에서 3연패하고 난 뒤 곧바로 출국했다. 봄 전지훈련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을 마무리훈련은 수석코치가 맡았다. 처음으로 분노가 아닌 실망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올해 다시 녀석이 바닥을 기자 팬들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떤 팬은 그라운드에 난입해 장난감 칼을 휘둘렀다. 상대 팀 버스가 나가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았다. 투수가 몸을 풀고 있는 불펜으로 내려가 훈련을 방해하기도 했다. 관중은 급감했다. 지난주에는 5000명을 간신히 넘긴 날도 있었다. 물론 아무리 줄었다고 해봐야 아직도 평균 관중은 2만 명 가까이 된다. 당연히 8개 구단 중 최고이다.

떠나는 팬도 나오기 마련이다. 그들은 자신이 더는 롯데 팬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찾은 잠실야구장. 경기 중간 중간 전광판을 통해 전해지는 다른 구장 소식. 녀석이 이기고 있다는 자막을 보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에 서로가 깜짝 놀라며 주위를 살피게 된다. 결국 지금 응원하고 있는 팀은 보험용이었던 것이다.

샘이 넘쳐야 도랑이 흐른다. 샘은 말랐는데 도랑에 물만 붓는다고 되지 않는다. 일단 클 놈부터 살려야 한다. 아마추어나 비인기 종목도 중요하지만 최고 인기 종목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른바 파급 효과다. 어떤 이에겐 분노와 실망, 그리고 환희가 교차하는 롯데이지만 녀석이 살면 야구가 살고, 다른 프로 리그가 살고, 그리고 전체 스포츠가 산다.

장환수 스포츠레저부장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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