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진흡]돼지고기는 억울하다

  • 입력 2009년 5월 6일 02시 58분


허상만 전 농림부(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장관 재직 시절 닭고기와 오리고기를 질리도록 먹은 적이 있다. 점심에는 삼계탕, 저녁에는 오리구이, 그 다음 날 점심은 통닭, 저녁은 오리탕…. 이런 식이었다. 주변에서는 고령(高齡)의 장관이 과도한 고기 섭취로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까지 나왔다.

허 장관이 닭과 오리고기를 유독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하루 세끼 중 두 끼를 ‘조류’로 채웠던 데는 웃지 못할 사정이 있다. 허 장관이 재임하던 2003년 말 한국에는 조류인플루엔자(AI)가 발생했다. 농림부는 익혀 먹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닭고기와 오리고기 소비는 급감했다.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고사해가는 축산농가를 방치할 수 없었던 그는 이렇게 해서라도 닭고기와 오리고기의 안전성을 ‘홍보’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요즘 비슷한 상황이 다시 벌어지고 있다. 멕시코에서 돼지를 매개로 한 것으로 알려진 신종 인플루엔자A(H1N1)가 발생하면서 국내 돼지고기 소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번에는 한승수 국무총리가 나섰다. 한 총리는 1일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국산 돼지고기 시식회를 갖고 “돼지고기는 굽거나 삶아서 먹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총리나 주무 장관의 시식 행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 한국적 현실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정상적인 일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과학적으로 위험성이 없는 고기에 대해 ‘안전성’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얘기다.

사실 신종 인플루엔자와 돼지고기 섭취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바이러스에 의한 호흡기 질환인 만큼 돼지고기를 71도 이상 온도에서 익히면 바이러스 자체가 죽는다. 익힌 돼지고기는 먹어도 전혀 위험이 없다는 뜻이다. 과거 국내에서 바이러스 질환인 AI가 발생했을 때 익힌 닭이나 오리고기를 먹고 AI에 감염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위생적인 국내 도축 환경도 고기의 안전성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1982년부터 축산물 가공처리법 등 관련 법률이 바뀌어 국내에서는 살아있는 돼지나 닭 등을 일반 재래시장에서 즉석에서 잡아 팔지 못한다. 정부가 인정하는 도축장에서 3차례 검사(생체, 해체, 실험실 검사)를 거쳐 도축돼 질병에 감염된 고기가 시중에 유통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번 신종 인플루엔자 발생 이후 국내 소비자들의 동요는 과거 AI사태 때와 비슷하다. 막연한 불안감이 과학적 연구결과나 분석을 압도하면서 돼지고기 판매량은 급감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최근 위생적으로 처리된 돼지고기는 신종 인플루엔자의 감염원이 아니라고 발표했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국내 소비자들이 돼지고기를 꺼리는 것이 과학적인 사고보다는 유행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지난해 광우병 사태가 벌어졌을 때 일부 세력의 의도적인 ‘사실 왜곡’에 과학적 연구 결과나 분석이 일시적으로 맥을 못 춘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는 설명이다.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은 “사람을 확신에 차게 만드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무지인 경우가 많다”는 말을 남겼다. 지난해 광우병 사태와 이번 신종 인플루엔자 발생 이후 벌어진 상황을 보면서 이 말이 왠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송진흡 산업부 차장 jinh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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