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고객 취향까지 잡아라” 기업 경영, 과학에서 예술로

  • 입력 2009년 4월 4일 02시 55분


표준화와 통제를 통한 틀에 박힌 업무 프로세스만으로는 고객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렵다. 예술가처럼 고객의 취향까지 고려해 차별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예술적 프로세스’가 고객의 마음까지 사로잡는 경쟁 포인트로 주목받고 있다.
표준화와 통제를 통한 틀에 박힌 업무 프로세스만으로는 고객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렵다. 예술가처럼 고객의 취향까지 고려해 차별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예술적 프로세스’가 고객의 마음까지 사로잡는 경쟁 포인트로 주목받고 있다.
엄격한 표준화론 한계… 리츠칼튼, 직원 재량권 강화 고객문제 효과적 대응

《“마니 도와조서 대다니 감사함니다(많이 도와줘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난해 11월 서울 리츠칼튼호텔에 숙박했던 한 미국인 노부부는 호텔을 떠나며 서툰 한국어로 감사 편지를 남겼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한국계 남편이 이 호텔 직원의 안내로 50년 만에 고향 동네를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다닌 초등학교 이름 정도만 희미하게 기억할 뿐이었다. 이 직원은 당시 학교의 위치와 동네를 알아내고 택시기사에게 보여 줄 위치 설명서와 지도도 한글로 만들어 주었다. 호텔 직원의 정성으로 그는 추억 속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이 노부부가 우연히 사람 좋은 직원을 만난 것일까. 절반은 맞는 얘기다. 나머지 비밀은 리츠칼튼호텔의 고객서비스 업무 프로세스(절차)에 있다. 이 직원의 행동은 정확하게 호텔 서비스 수칙 3조 ‘고객들에게 독창적이고 개별적이며 잊지 못할 경험을 만들어 내기 위한 권한을 갖고 있다’를 실천한 사례다.

2006년 세계적인 호텔체인인 리츠칼튼은 ‘직원들은 고객의 짐을 들어야 한다’거나 ‘고객을 안내할 때는 직접 모시고 가야 한다’는 식의 엄격한 고객 서비스 조항을 없앴다. 대신 ‘고객의 소망까지 알아차려 즉각 응대한다’와 같은 ‘가치 진술(Value Statements)’ 방식으로 바꿨다. 고객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직원들이 판단력과 임기응변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조항도 20개에서 12개로 줄였다.

과학적 표준화와 통제보다 창의성으로 고객의 마음까지 사로잡는 예술가적 기질을 토대로 한 업무 프로세스가 기업 현장을 파고들고 있다. 예술과 과학의 경계가 무너지는 ‘크로스오버’ 현상이 기업 경영에 스며드는 것이다.

미국 다트머스대 턱 경영대학원의 조지프 홀, 에릭 존슨 교수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최근호(3월호)에서 “기업이 예술적 프로세스(artistic process)를 제대로 시행하고 운영한다면 쉽게 모방하거나 상품화할 수 없는 차별성을 만들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 글의 전문은 동아비즈니스리뷰(DBR) 30호(2009년 4월 1일자)에 실려 있다.

○ “이제는 과학이 아니라 예술”

연구팀에 따르면 세계 각국의 제조업체들이 도요타 생산방식(TPS)을 본뜬 제도를 통해 품질 및 효율을 엄청나게 향상시켰다. 하지만 이 같은 ‘과학적 프로세스(Scientific processes)’가 적합한지 따져 보지 않고 남용돼 부작용을 겪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필자들은 “기업인과 컨설턴트들이 프로세스 표준화를 무분별하게 추진하고 있다”며 “과학보다는 예술적 성격이 강한 프로세스는 본질적으로 체계화한 표준화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한 대안이 고객의 개인 취향까지 충족시키는 ‘예술적 프로세스’다. 생산에 투입하는 자재가 동일하지 않아 ‘장인의 손길’을 거쳐야 하거나 차별화된 상품, 서비스에 가치를 두는 고객을 상대할 때 특히 필요하다고 필자들은 지적한다.

‘서비스 명가(名家)’인 리츠칼튼도 다양한 고객 욕구 때문에 ‘예술적 프로세스’를 선택했다. 획일화된 프로세스로는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보고 직원 재량권을 확대한 것이다. 이 호텔 직원들은 고객의 문제 해결에 2000달러까지 쓸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다.

○ 과학과 예술이 어우러진 매트릭스

연구팀은 ‘예술적 프로세스’가 필요한 분야로 헤지펀드 운용, 리더십 훈련, 회계감사, 고객서비스, 소프트웨어 개발, 신규 사업개발, 산업 디자인 등 다양한 고객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는 업무를 꼽았다.

표준화된 과학적 프로세스와 예술적 프로세스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조화를 이룰 수도 있다. 다만, 이 두 프로세스를 엄격히 구분해야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연주자들이 선호하는 그랜드 피아노 제조업체인 스타인웨이앤드선스는 피아노를 시장에 내놓기 직전에 음을 맞추는 조율 과정을 숙련공의 판단력과 경험에 의존한다. 이 과정이 ‘예술적 프로세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조율사들은 먼저 고객인 피아니스트로부터 피드백을 받는다. 일대일 도제시스템을 통해 숙련된 조율사들은 이를 바탕으로 피아노 줄, 해머, 기타 작동 부품을 맞춰 까다로운 연주자들의 입맛에 맞는 상품으로 만들어낸다.

이에 앞서 피아노부품을 규격화하고 컴퓨터가 통제하는 생산라인에서 제작하는 표준화된 ‘과학적 프로세스’ 과정을 운용한다. 효율성을 높이고 조율사들이 들쭉날쭉한 부품 때문에 고생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필자들의 설명이다.

○ 3단계 접근법으로 행동에 옮겨라

연구팀은 ‘대상 파악-인프라 구축-재평가’의 3단계 접근법을 실천 방안으로 제안했다. 먼저 예술적 프로세스가 필요한 부문이 어디인지를 살펴야 한다. 이를 위해 프로세스의 다양성과 고객에게 주는 가치를 기준으로 분류한 ‘프로세스 매트릭스’를 쓴다.

리츠칼튼은 고객 접촉 빈도가 높은 프런트데스크, 서비스 예약 및 상담 직원, 웨이터 등에게는 재량권을 줬다. 반면 객실 청소, 설비 관리 직원은 면밀하게 정해진 규칙을 엄수하도록 했다.

필자들은 “과학적 프로세스를 이미 확립했거나 고객이 다양성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예술적 프로세스를 중시할 필요가 없다”며 “오히려 표준화 프로그램을 도입한 경쟁사에 따라잡힐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과를 평가하고 직원을 교육하는 인프라도 필요하다. 특히 예술적 프로세스의 성공 여부는 외부의 평가를 거쳐야 한다. 스타인웨이앤드선스가 피아니스트들의 피드백을 받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술적 프로세스를 위한 직원 교육 방법으로는 도제식 수련을 거치는 견습생 과정과 스토리텔링 방식의 교육 등이 있다. 스타인웨이앤드선스 피아노 조율사들은 1∼3년의 일대일 견습과정을 거친다. 리츠칼튼 직원들은 매일 15분씩 모임을 갖고 고객에게 감동을 준 성공적인 서비스 사례를 함께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링식 교육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프로세스를 정기적으로 재평가하고 새로운 기술, 고객의 변화, 비용 대비 효용, 사업 기회 등을 점검해야 한다. 리츠칼튼의 새로운 변신도 이런 노력의 결실로 볼 수 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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