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영균]實勢, 결국 시간과 싸워야 한다

  • 입력 2009년 4월 3일 03시 02분


‘모든 길이 총리실로 통한다’던 때가 있었다. 총리실 직원들이 지금도 그리워하는 이해찬 총리 시절이 그랬다. 노무현 정부 때 이 총리가 등장한 뒤 총리실 위상은 현저히 격상됐다. 재임 20개월 동안 1급 두 자리가 늘었다. 직원은 경호원을 뺀 청와대보다 많아졌다.

업무 능력이나 효율도 그만큼 나아졌을까. 그러나 성과는 별 볼 일 없었다. 기구가 늘어나면서 중복 조직이 생기다 보니 업무 효율은 오히려 떨어졌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일부 조직이 축소됐다. 그게 정상이지만 힘 좋을 때가 어찌 그립지 않겠는가.

王차관들의 실세 모임

이명박 정부에서도 올 1월 하순 이후 국무총리실에 오랜만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세(實勢)가 왔기 때문이다. 실세는 한승수 총리가 아니다. 총리실 주관 회의에 참석하는 각 부처 사람들이 앞 다투어 명함을 들고 인사하는 박영준 국무차장(차관급)이다.

올해 초 ‘1·19 개각’ 때 임명된 박 차장은 자타가 인정하는 ‘MB맨’ 실세다. 대통령기획조정비서관 시절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이 제기한 ‘권력 사유화(私有化)’ 파문으로 물러났다가 국무총리실로 복귀한 것이다. 청와대에 있을 때 별명이 ‘왕수석’이었던 그가 7개월 만에 ‘왕차관’으로 돌아온 셈이다.

박 차장 이외에도 ‘왕차관급’이 몇 명 더 있다.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1차관, 장수만 국방부 차관 등이 그들이다. 이들 왕차관 4명과 장관급인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4+1 주례 모임’을 8주간 가진 뒤 구설이 생기자 해체했다.

‘왕차관’ 모임은 이 정부에서도 자칭 타칭 ‘실세’들이 등장할 소지를 보여주었다. 이 대통령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현대건설에서 오랫동안 최고경영자로 일한 만큼 재계 인맥이 넓고, 서울시장으로서 함께 일한 공무원도 많다. 오랫동안 정치를 했던 ‘만사형통(萬事兄通)’ 인맥도 예사롭지 않다.

이른바 ‘실세’처럼 행세하는 사이비(似而非) 실세들도 나올 수 있다. 노무현 정부 때 무성했던 각종 위원회도 바로 정권 창출을 도왔다는 자칭 타칭 실세들을 위한 위인설관(爲人設官)이 아니던가. 17개나 되는 과거사위원회만 해도 이념화된 힘만 행사했지, 책임은 지지 않았다.

권력을 보고 몰려드는 사이비 실세들이 제 역할을 할 리 없다. 실세 중의 실세였던 이해찬 전 총리도 충돌만 일으키다 낙마했다. 주어진 권력을 주체하지 못해 실패한 경우도 많다. 마구 방망이를 휘둘렀으나 안타 하나 못 치는 것과 같다. 이 전 총리가 만든 이른바 ‘이해찬 세대’도 헛스윙의 결과 아닌가.

대통령이 ‘실세’ 제대로 관리해야

이 정부의 실세들은 노무현 정부 때보다 더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수만 늘리는 위원회를 일부 구조조정하는 대신 ‘왕차관’들처럼 행정조직으로 직접 뛰어들었다. 100년 만이라는 경제위기에 일자리창출 민생안정 등 할 일은 산적해 있다. 의욕이 넘칠 것이다. 그러나 박연차 리스트에 올라 나가떨어지는 노무현 정부의 실세들을 보고 옷깃을 여며야 할 것이다. 그들도 나름대로 의욕이 넘쳤고 개혁과 도덕성을 외치지 않았는가.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다.

하긴 실세도 대통령이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대통령 당선을 도왔으니 대통령이 나를 괄시하지 못한다’는 식의 실세는 특히 그렇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실세들이 기승을 부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물을 건넜으면 타고 온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대통령은 ‘실세는 지금부터 나 하나만으로 족하다’고 못 박았으면 싶다. 실세들의 버릇을 잘못 들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말 일이다.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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