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공종식]영어교육에서 to부정사를 폐하라

  • 입력 2009년 3월 26일 02시 58분


얼마 전 중학교 2학년 딸이 “To see is to believe(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에서 ‘to believe’가 왜 to부정사 명사적 용법인지를 물었다. 주격보어 역할을 하기 때문에 명사적 용법이라고 설명했더니 “주격보어는 뭐예요”라고 되물었다. 말문이 막혔다. 딸은 “왜 이걸 다 배워야 하느냐”며 물었다.

“시험에 나오니까 일단 외우는 게 좋겠다”고 말했지만 머리가 띵했다. 중학교 시절 씨름했던 to부정사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랬다. 당시 to부정사 용법 공부는 ‘고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to부정사의 다양한 용법’을 구분하는 게 실제 영어를 이해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대한민국 중고교생들은 여전히 to부정사 용법을 외운다. 시험에 나오기 때문에.

뉴욕특파원으로 미국에 있었던 3년 동안 딸이 영어시간에 to부정사를 배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미국에서 영어수업은 읽기, 쓰기, 어휘 등에 집중돼 있다. 영어가 모국어인 학생과 외국어로 영어를 배우는 학생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가르칠 수는 없다. 영어가 외국어일 경우 기본문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런데 한국처럼 중고교생에게 to부정사의 세세한 용법, 단순 및 의지미래에 따른 ‘will’과 ‘shall’의 구분 등 고난도의 영어문법을 가르치는 것은 재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법은 대학에서 영어전공자들이나 배워야 할 내용이다.

유엔본부를 취재할 때 국가별 영어실력을 살펴본 적이 있다. 대체로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출신들이 잘했다. 영어를 잘했던 네덜란드 출신 기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학교 다닐 때에 to부정사를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용어 자체에 익숙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네덜란드는 그 대신 TV에서 영어로 제작된 프로그램을 네덜란드어 자막과 함께 방송하는 등 영어학습 환경이 자연스럽다고 했다. 기자가 중고교 시절 열심히 공부했던 영어문법은 그에겐 ‘낯선 영어’였다.

언젠가 일본 기자와 이야기하다가 기자가 배웠던 영문법 용어가 일본과 똑같다는 점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일본과는 심지어 영문법 참고서 목차까지도 닮았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라는 말도 사실 영미권에선 별로 알려지지 않은 말이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에서만 유독 유명한 영어 어구다. 19세기 삿포로대 농대 초대 부학장으로 있던 윌리엄 클라크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말이 일본 영문법 참고서를 거쳐 한국에 넘어온 것이라고 한다. 한국 영문법 참고서가 얼마나 일본 책을 베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서구화에서 한국보다 앞섰던 일본에선 배울 게 많다. 그러나 영어교육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외국에서 지켜본 일본인들의 영어실력은 그리 썩 뛰어난 편은 아니다.

‘언어의 백화점’ 유엔에는 항상 외국어 교육을 강조하는 문화가 있다. 식당에 가면 테이블마다 메뉴판 뒤에 ‘외국어 잘하는 법’이 적혀 있을 정도다. ‘문법에 신경 쓰지 말 것’이 첫 번째 항목에 들어 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중고교생들이 to부정사 용법을 배우는 시간에 영어 단어 한 개, 생활영어 한 대목을 외우는 것이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식 영어문법 교육, 이제 재고해야 한다.

공종식 국제부 차장 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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