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장자연과 우리 안의 파파라치

  • 입력 2009년 3월 20일 03시 00분


이런 일을 점입가경이라고 하나?

배우 장자연 씨가 자살하기 전 쓴 문건을 둘러싸고 추문이 이어지고 있다. 연예인이 얽힌 사건이 늘 그랬듯 이번에도 뒷담화가 더 시끄럽다.

이게 한류를 이끈 한국 대중문화의 수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물론 이 사건을 계기로 연예계 비리를 근절하고 구조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문화체육관광부도 연예매니지먼트업의 등록제를 정부 입법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공인 매니저 제도를 시행하겠다는 취지다.

이런 모범 답안이 올바르긴 한데 현실의 담론으로 이어질지 의문이다. 연예계를 보는 우리의 시선이 제도와 대책을 모색할 만큼 진지했던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도 우리 안의 파파라치를 보는 듯하다. 다른 여배우들의 사생활이나 연예비즈니스의 이면에 대해 ‘∼카더라’가 쏟아지고 있다. 특히 문건에 대기업 회장, 일간지 간부, 방송사 PD, 기획사 대표의 실명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돈과 추문과 권력이 버무려진 삼류 소설로 비화되고 있다.

지난해 초 나훈아 씨가 고생한 루머 사건도 그랬다. ‘신체 훼손설’ ‘염문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그의 명예는 휴지가 됐다. 오죽하면 생방송 회견 중 테이블에 올라가 지퍼를 내리려 했을까. 그 강단 덕분에 소문은 사그라졌지만, 한국의 대표 가수를 보는 시선은 집단 관음증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해명이 또 다른 ‘연예’가 됐다.

미국에서 음악프로듀서로 활동하는 박진영 씨는 10여 년 전 ‘딴따라’라는 타이틀로 음반을 냈다. 그는 기자에게 “딴따라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 대한 우스갯소리로 이해해 달라”고 했다. 당시 20대였던 그는 드물게 연예산업 발전을 위한 꿈과 연예인의 권리에 대해 정돈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지금도 그의 문제 제기는 유효하다. 연예계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지 않았다.

연예계가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은 먼저 연예계의 책임이다. 스타 시스템이나 비즈니스가 불투명하고, 그 때문에 역량을 지닌 인재들이 오지 않는 악순환이 빚어진다. TV에서 정리된 생각도 없이 노출 빈도만 올리려는 아이돌 스타도 흔하다. 잠자는 모습도 중계하고, 자기 아이나 친구를 데리고 나와 웃음을 자아내려는 방송도 있다. 팬들에게 더 다가설 수 있다지만 감동 없이 자질구레한 신변잡기로 그런 소통이 이뤄질 것 같진 않다. 밑천이 바닥나자 주변 사람들을 방송에 끌어들인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래서야 존중받기 어렵다.

그런 이야기에 솔깃해하는 대중의 책임도 크다. 대중문화가 시대를 반영한다면, 우리가 보고 듣고 즐기는 대중문화는 우리의 수준이다. TV 스타들의 어이없는 말과 동작, 그들끼리 밥 먹고 논 이야기, 여배우에 대한 추문에만 눈과 귀를 기울인다면 그게 곧 우리의 수준이다.

장 씨가 ‘원하지 않는 자리’에 가도록 강요받았다는 고백에 대한 사실 규명은 유족을 위해서라도 꼭 해야 하며 그리 어렵게 보이지도 않는다. 장 씨의 소속사 전 대표인 김모 씨, 문건을 처음 받은 유장호 씨, 문건에 나온다는 실명 등 밑그림이 나와 있다. 알면서 모른 체하는 관계자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실체가 밝혀진들, 이번 사건이 연예계가 한걸음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 같진 않다. 우리 사회가 이미 파파라치가 주는 오락적 요소로 이번 사건을 보기 때문이다. 장 씨의 죽음이 안타깝다.

허엽 문화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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