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변희재]한국가요가 빌보드차트 1위에 오른 사연

  • 입력 2009년 3월 6일 02시 59분


1995년 작곡가이자 가수 이원진은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라는 듀엣 발라드 곡을 발표한다. 이 곡은 곧바로 각종 국내 차트 1위에 오른다. 이 시기는 서태지 김건모 신승훈 등이 활발히 활동했을 때로 한국가요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이원진은 199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짧고도 아쉬운 음악인생을 마치고 만다.

홍콩 배우 장쉐유(張學友)과 필리핀의 전설적 여가수 레진 벨라스케스는 듀엣곡 ‘In love with you’를 이 무렵 발표한다. 이 곡은 홍콩 차트와 필리핀 OPM 차트 1위에 오르며 동남아시아 최고 인기곡으로 부상했다. 이때만 해도 국내에서 홍콩과 필리핀 음악을 접하기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1998년 컴필레이션 앨범 ‘Duets’에 이 곡이 수록되면서 국내 마니아 사이에 논란이 벌어졌다. ‘In love with you’가 이원진의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와 표절 수준으로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원진이 사망했기 때문에 표절과 저작권 논란은 필리핀 측 작곡가의 사과로 마무리되었다.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0년 미국 최고의 록발라드 가수 머라이어 캐리가 ‘Thank God I found you’를 미국 빌보드차트 1위에 올려놓으면서 다시 표절 논란이 시작되었다. 이 곡의 후렴 부분이 ‘In love with you’와 너무 흡사했던 것이다. 필리핀과 홍콩, 한국 음악팬들은 즉각 인터넷에서 머라이어 캐리 측을 비판했다. 그러자 인용 수준의 샘플링이었다는 비공식 해명을 내놓게 된다.

외국가수들이 표절한 우리노래

표절이나 저작권 문제를 넘어서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 ‘In love with you’ ‘Thank God I found you’의 관계는 대중문화사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원진이라는 사실상 무명의 한국 작곡가의 노래가 표절과 샘플링을 거쳐 5년 사이에 홍콩과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 그리고 미국에서 1위에 오른 것이다. 만일 이원진이 살아 있었더라면 세계적 작곡가로 활동했을 것이다.

머라이어 캐리 측은 이원진의 원곡이 아니라 장쉐유과 레진 벨라스케스의 곡을 샘플링했다. 한국이 한류를 통해 아시아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미국시장만 놓고 볼 때 우리가 홍콩이나 필리핀, 인도, 태국보다 앞서 있다는 증거는 없다.

미국에서 개봉한 아시아 영화 중 최고 흥행작은 1억 달러의 매출을 올린 ‘와호장룡’이다. 태국의 ‘옹박2’는 초저예산 영화인데도 ‘디 워’와 비슷한 1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일본 애니메이션 판권은 여전히 미국에서 고가에 팔리고 있다. 이번 아카데미 영화상 8개 부문을 휩쓴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와 영국의 합작영화였다.

음악 분야에서는 필리핀의 활약이 눈부시다. 프레디 아귤라는 불후의 명곡 ‘아낙’을 빌보드차트 1위에 올린 바 있다. 필리핀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레아 살롱가는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공연했으며 현재 최고 여가수인 사라 제로니모는 10대 시절 카네기홀에서 공연했다. 지난해에는 매니 파퀴아오(필리핀)와 오스카 델 라 호야(미국)의 세계 복싱 타이틀전에서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필리핀 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일본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는 한류 현상의 원인으로 600만 명의 한민족 네트워크와 이웃나라를 침략하지 않은 평화의 역사를 꼽았다. 즉 아시아인에게서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만 한류가 지속되고 확산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아시아문화 수용때 한류도 살아

그러나 과연 우리가 아시아 문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을까? 영화는 한국영화가 50%대를 점유하고 지상파 드라마는 90%, 음악시장은 80% 이상 한국 독점이다. 그 나머지는 미국 대중문화이고 아주 가끔 일본과 중국 것을 접할 수 있다. 인도 필리핀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한류 수출 지역의 문화는 공식 유통체계로 접할 방법이 없다. 세계적으로 이런 수준으로 자국(自國) 문화를 독점하는 나라는 미국과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100만 명의 외국인이 살아가는 다문화국가이다. 특히 경기 안산 지역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모든 문화가 들어와 있다. 최소한 아시아대중문화센터, 아시아문화포털 등을 개설해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아시아문화 네트워크 국가가 될 때 침체된 한류도 살아날 것이며 다문화 정책도 힘을 받을 것이다.

변희재 객원논설위원·실크로드CEO포럼 회장

pyein2@hanmail.net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