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기홍]용두사미로 끝난 駐美대사관 구조조정

  • 입력 2009년 2월 4일 03시 01분


“워싱턴에 있어 보니 OO청 주재관까지 나와 있더군요.”

1년여 전,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공직 구조조정에 대한 의지가 충만했다. 그는 “해외 공관에 쓸데없는 공무원이 너무 많이 나와 있더라”며 상징적 케이스로 워싱턴 주미대사관을 꼽았다.

국회의원을 사퇴하고 1998∼1999년 워싱턴에서 ‘낭인(浪人)’생활을 한 체험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당시엔 태산 같은 무게로 다가왔다. 고위직 밥그릇 챙기기의 고질적 사례로 지적돼 온 해외주재관 제도가 바야흐로 수술대에 오를 것이란 긴장감이 돌았다.

그처럼 ‘태산명동(泰山鳴動)’하며 시작된 워싱턴 공관 구조조정이 최근 확정됐다. 그런데 결과는 대통령의 말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주미대사관엔 정보, 국방협력, 문화홍보 등의 분야를 제외하고도 각 부처에서 총 24명(직무파견 포함)의 주재관이 나와 있다. 그런데 이번에 줄어드는 주재관은 두 명에 불과하다.

노동부 주재관 자리가 폐지되며, 재정경제부에 통합된 기획예산처 직무파견, 해양수산부와 통합된 건설교통부 주재관 등 총 3자리가 준다. 대신 검역관이 생겨 총원이 24명에서 22명으로 바뀌는 것.

정부는 당초 “부처 통폐합을 반영하며 국장급을 과장급으로 낮춘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그런데 교육인적자원부(시교육위원회 포함해 2자리)와 과학기술부(1자리)가 교육과학기술부로 통합됐건만 주재관은 기존 세 자리 그대로다. 기획재정(2명) 교육과학(3명) 행정안전 국토해양 통일부, 국세청 관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대부분 부처가 자리를 유지했다. 국장급이 과장급으로 바뀐 곳은 없다.

워싱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본부에도 수십 명이 파견 나와 있다. 정부 분담금에 따라 할당돼 ‘신(神)의 보직’으로 불리는 이들 자리는 전통적으로 힘센 경제부처가 독차지해 왔는데 이를 개방한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다.

주재관 가운데는 통상, 농무, 사법공조 등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외교업무가 쌓여 있는 분야도 많다. 무조건 줄이는 게 능사는 아니며 국력에 맞게 옥석을 가려 필요한 곳은 과감히 더 늘려야 한다.

하지만 일에 따라 사람이 나오는 게 아니라 근무여건 좋은 곳에 간부 보직을 확보하려는 부처 이기주의 차원의 발상이 합리적 인적 배분을 방해하면 곤란하다.

청와대가 칼을 빼들고 근 1년을 끌었지만 결국 ‘서일필(鼠一匹)’로 끝나는 걸 보면서 공직 개혁의 어려움을 실감하게 된다.

이기홍 워싱턴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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