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대성학원 반창회의 기억

  • 입력 2009년 1월 12일 02시 58분


처음엔 그저 그렇고 그런 상가건물 리노베이션인 줄 알았다. 그 건물뿐 아니라 지난해부터 서울 광화문 곳곳에서 재건축과 리노베이션 바람이 불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 건물 외벽에 대성학원(大成學院)이란 간판이 나붙었다. 연말이 가까워지자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 사이에 ‘대성학원이 광화문으로 돌아왔다’는 광고전단이 끼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광화문에 웬 입시학원인가 싶었지만, ‘그 대성학원’이 분명했다.

1980년 봄, 갓 대학에 입학한 시골학생-서울학생들은 부산도 시골이라 불렀다-에겐 캠퍼스 입구의 대형게시판이 세상을 보는 작은 창(窓)이었다. 막 개강을 했을 때였다. ‘대성학원 문과1반 모이자’라는 알림 종이가 나붙었다. 희한했다. 대학입시 준비 학원이라곤 종로학원 정도밖에 모르던 시골학생이라 그런지, 아니면 재수를 하지 않아 그런지 같은 학원 재수생들끼리 반창회를 한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다. 그런데 아니었다. 대성학원은 종로학원만큼이나 유명한 학원이었고, 재수해서 들어온 신입생은 대개 종로학원 아니면 대성학원 출신이었다.

고(故) 김만기 회장이 광화문에 대성학원을 설립한 게 1965년. 김 회장이 타계한 2005년 현재 학원을 거쳐 간 입시생이 25만 명이라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필자와 함께 입학한 대성학원 출신들은 ‘노량진 1기’였지만 지금은 강남, 송파, 부산 등지에도 학원이 있다.

아직 1월이라 재수생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매일 출근길에서 만나는 광화문 대성학원은 내게 갖가지 상념의 출발점이 되곤 한다. 끝 모를 경제위기로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때라서 그런지 요즘엔 부쩍 나라 상황과 재수생의 처지가 겹쳐진다. 경제난이 미국발 금융위기라는 외생 변수에서 시작됐지만 결국엔 재수생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 나 자신과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 재수생도, 대한민국도 올 한 해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외환위기 때도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학원에서 혹독한 재수생활을 한 적이 있다. 외형적으로는 성공적인 재수생활이었다. 1997년 대선 당일 39억40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액이 1999년 741억 달러로 늘어나자 김대중(DJ) 대통령은 그해 말 ‘IMF 졸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외환보유액 급증은 기업이 투자를 중단하고, 소비가 위축되면서 수입이 줄어들어 국제수지가 흑자로 반전한 영향이 컸다. 졸업 선언은 DJ의 성급한 낙관이거나, 아니면 2000년 총선용 정치쇼에 가까웠다. 당시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이었던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은 “DJ의 돌이킬 수 없는 오판으로 정부의 개혁 및 구조조정 노력이 이완되면서 이후 우리 경제가 다시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 결정적 요인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재수(再修)는 필수고, 삼수(三修)는 선택”이라는 말이 있었다. 재수는 원하는 대학 입학에 필요한 성적뿐 아니라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인생에 눈을 뜰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는 뜻이다. 그 뜻을 모르고 대학 합격증만 받아든다면 ‘절반의 성공’에 불과할 것이다. 올 한 해가 경제 살리기는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좌표와 성숙도를 겸허하게 되돌아보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김창혁 교육생활부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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