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흥분한 앵커들

  • 입력 2009년 1월 8일 02시 58분


2001년 이즈음, 방송광고시장의 변화를 두고 MBC가 발끈했다. SBS는 민영미디어렙(방송광고판매대행사)이, KBS MBC는 공영미디어렙이 맡는 방안을 문화관광부가 내놓자 MBC는 민방과 같은 미디어렙을 달라고 했다. 그때도 MBC는 공영과 민영 사이를 오간 것이다.

당시 MBC는 ‘뉴스데스크’ ‘PD수첩’ 등에서 총력전을 벌였다. 문화부와 신문을 연일 비난했다. ‘뉴스데스크’의 권재홍 앵커는 뉴스 도중 벌떡 일어나 미디어렙 보도를 진행했다. 한 시청자는 “앵커가 저렇게 흥분해도 되느냐”며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왔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민언련 전신)도 성명에서 “뉴스데스크가 미디어렙 문제를 자사(自社)의 입맛에 맞는 내용만 보도한다”고 했다.

최근 미디어의 이해가 엇갈리는 방송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MBC 앵커들은 8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뉴스데스크는 “MBC 민영화로 방송을 장악하려 한다”며 개정안 반박 기사를 되풀이했고, 노조원 앵커들은 뉴스에서 파업 동참을 밝히고 자리를 떴다.

지난해 노조의 파업 전날 박혜진 앵커는 뉴스데스크에서 “파업에 동참하기 때문에 시청자 여러분을 뵐 수 없다. 방송법 내용은 물론 제대로 된 토론도 없어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MBC는 박 앵커 등이 거리에서 유인물을 돌리는 장면도 내보냈다.

신경민 앵커는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던 KBS의 ‘제야의 종 중계방송’을 가리켜 “(법안 반대 시위로 인한) 소란과 소음을 지워버린 중계가 있었다. 사실이 현장의 진실과 다를 수 있는 점을 시청자가 현장실습 교재로 열공(열심히 공부한다는 뜻의 은어)했다”고 말했다. 김세용 주말 앵커도 “손정은 앵커가 파업에 참가했다. 죄송하다는 손 앵커의 말을 대신 전한다”고 했다.

MBC 뉴스데스크는 1970년 국내에서 처음 앵커를 도입한 이래 이득렬 엄기영(현 사장) 정동영 앵커 등으로 채널 이미지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민영이냐 공영이냐’는 자사 위상 문제가 거론되면 침착함을 잃는 앵커가 많았다. 앵커의 어투와 몸짓이 메시지가 되는 TV의 대면(對面) 효과를 감안하면, MBC는 자사 문제에 대해 시청자의 판단을 강요해 온 셈이다.

삼풍백화점 참사 때 비장함이 깃든 말로 현장을 중계한 정동영 기자처럼 TV에서 나오는 감정이 시청자에게 받아들여지는 드문 사례도 있다. 미디어가 시청자의 공분(公憤)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건과 달리, 법 개정안에 반발해 MBC 앵커들이 뉴스룸을 떠난 이번 경우에는 시청자의 공감을 얻기 어려울 듯하다.

다시 8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권 앵커가 흥분한 뒤인 2002년 MBC는 뉴스데스크에 엄기영 앵커를 복귀시켰다. 뉴스데스크 시청률이 KBS ‘뉴스 9’에 크게 떨어지자 6년 만에 재등장시킨 것이다.

최근 뉴스데스크의 시청률은 더 나쁘다. 한 달 내내 지상파 3사 중 꼴찌다. 이유야 많지만 사회 갈등을 보도하면서 MBC의 채널 이미지가 ‘흥분 방송’이 된 것 같다는 진단도 나온다.

앵커의 흥분과 관련해 미국 NBC ‘미트 더 프레스’를 진행했던 고(故) 팀 루서트가 자서전에서 밝힌 일화가 있다. 그는 객관적인 질문자의 선을 넘어 편파적인 심문관 같았다는 평을 듣자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다. 아버지는 말했다. “앞으로 누군가를 몰아붙이려거든 나치주의자에게나 해라.” 앵커의 흥분은 시청자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허엽 문화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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