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조동호]쉰 즈음, 기러기들 다시 날자

  • 입력 2009년 1월 2일 02시 59분


울지 말라고,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정호승은 그의 시 ‘수선화에게’에서 말한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며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심지어 하느님도 가끔은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면서 우리를 달랜다.

고마운 위로지만 우리는 울지 않고 살았다. 이제 사오정에서 오륙도로 가는 우리 세대는 그저 애매하게 살아왔다. 7080이라고 중년의 세대를 한꺼번에 부르지만 80학번을 전후한 우리는 1970년대 초반이나 1980년대 후반 학번 세대와는 다르다. 우리는 선배들처럼 통기타 세대도 아니었고 후배들처럼 워크맨 세대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포크는 너무 느렸고 랩은 너무 빨랐다.

우리는 중간에 끼여 살았다. 선배들만큼 배고프지는 않았지만 후배들처럼 배낭여행을 할 수 있었던 세대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적으로 풍요했지만 상대적으로 빈곤했다. 그만큼 밋밋했고 둘 사이에서 그만큼 혼란스러웠다. 대학 시절 낮에는 과외교사를 했지만 밤에는 야학교사를 했고 미팅에서 히히거릴 때는 생맥주를 마셨지만 서클에서 민주를 논할 때는 막걸리를 마셨다.

‘오륙도’로 가는 80년 전후 학번

정신적으로도 그랬다. 선배 세대에게 미국은 주로 혈맹이었고 후배 세대에겐 대체로 미제(美帝)였지만 우리에겐 그 모두여서 고통이었다. 미국 문화원을 방화하기도 했지만 우르르 토플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때려잡자 공산당’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우리 민족끼리’도 아니었다. 유신체제보다는 부드러웠지만 문민시대는 아직 아닌 ‘선진조국’에서 어설프게 청춘을 보냈기 때문일까, 우리 세대는 정치적인 동시에 정치적이지 않았고 공동체를 이야기하면서도 개인주의 성향을 무시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휩쓸리며 살았다. 간혹 윗세대에 붙기도 하고 때론 아랫세대에 어울리기도 하면서. 1987년 6월, 스스로 나서자니 두려웠고 그렇다고 가만 지켜보자니 부끄러웠다. 어정쩡하게 넥타이를 맨 채 따라다녔다. 웃옷을 벗을 용기는 있었지만 넥타이를 풀 자신까진 없었다. 그리곤 중간에 슬쩍 회사로 돌아오곤 했다. 이만하면 됐다고 나도 동참했다고 뿌듯해하면서, 동시에 이젠 직장이랑 가정부터 생각하는 소시민적 비겁에 우울해하면서. 우리 나이 서른 즈음이었다.

그래, 그때부터 이미 우린 기러기였다. 떼 지어 날아다니는 기러기의 버릇처럼 우리는 늘 단체 속에 휩싸이기를 좋아했지만 홀로 되면 평생 재혼을 하지 않고 새끼를 키우는 기러기의 습성처럼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마흔 즈음 외환위기가 왔고 우리 중 일부는 ‘달 밝은 가을밤에 기러기들이 찬 서리 맞으면서 어디로들 가나요’ 라고 ‘국민학교’ 시절 배운 노래처럼 자신이 진짜 기러기가 되어 이민을 떠났다. 대부분 실직이 이유는 아니었다. 실직은 선배 세대가 집중적으로 당했다. 우리는 시간문제일 뿐 조만간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임을 알았고, 그래서 미리 떠났다.

떠나는 자나 보내는 자나 울지 않았다. 나름대로 더 나은 세상을 찾아 떠났으므로. 노모를 위해 광부로 떠나지 않고 자식을 위해 영어의 모국으로 떠났으므로. 떠나지 않은 혹은 떠나지 못한 일부는 가족을 보냈다. 아이만을 보내기도 했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았고, 기꺼이 선택한 일이었으므로 슬퍼하지 않았다.

새해 험한 일상으로, 씩씩한듯이

설령 가족이랑 함께 있어도 기러기였다. 후배 세대처럼 가정적이지도 못했고 선배 세대처럼 가부장적이지도 못했다. 그래서 서울에 같이 있든 혹은 미국이나 뉴질랜드로 보냈든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잠자는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느냐의 차이일 뿐, 유학비를 버는 일과 과외비를 버는 일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눈물 흘리진 않았다. 우리의 운명이라 믿었으므로. 30대 대기업 사장이나 30대 중앙부처 국장은 선배 세대에나 가능한 일이었고 후배 세대처럼 학생운동 경력조차 인생살이의 방편으로 써먹을 정도의 뻔뻔함은 없었으므로. 그저 묵묵히 일했고, 그 어떤 외로움도 스스로 선택한 외로움이었다.

어제 설날, 떡국 한 그릇 함께 먹었든, 멀리 전화 한 번 했든 우리는 오늘 또다시 작년보다 더 험해진 새해의 일상으로 나섰다. 씩씩하게, 아주 씩씩한 듯이.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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