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종범]위기때 ‘경제 체력’ 키우기

  • 입력 2009년 1월 2일 02시 59분


정부 R&D 투자에 달렸다

경제학자와 점쟁이는 닮았다. 과거는 잘 맞히는데 미래를 잘 못 맞힌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다지 실력 있는 경제학자가 아니라도 과거 주가에 대해서는 똑 부러지게 인과관계를 설명한다. 반면 지속적으로 미래의 주가를 정확히 예측하는 경제학자는 거의 없다.

우리는 지금 밀턴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시카고학파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몰락을 바라보고 있다. 앨런 그린스펀 같은 당대 최고의 실물경제 전문가도 이들의 이론에 따라 통화 수급 위주의 경제정책을 운용했다. 결과적으로 20세기 초반의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가 다가오고 말았다.

이들이 실패한 이유는 산업 생산성 향상 비율만큼 경제가 좋아진다는 기본적인 논리를 경시한 탓인 것 같다. 특별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미국발 경제위기로 엄청난 고통을 받아야 하는 우리로서는 솔직히 억울하고 답답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다.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산업 생산성 향상의 핵심 요소는 기술 개발이다. 이 때문에 경제 회복을 위한 중요한 정책 중 하나는 연구개발(R&D)을 촉진하는 일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미래 성장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R&D 투자가 필수이다. 저탄소 녹색 성장,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수준으로 R&D 투자비 확대 같은 내용을 보면 정부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공공부문 R&D 투자의 효율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향후 5년 내에 공공 및 민간 R&D 투자를 GDP의 5%까지 올리겠다는 정책이 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다. 정부의 목표 설정은 무리라는 게 이들 주장의 요지다.

과연 이런 비판이 타당할까. 단순하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거시경제 환경 변화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위기 상황에서는 기술적 불확실성이 증가하므로 경영자는 위험을 회피하려는 성향을 갖는다. 불황기에는 원가 절감 압력이 가중되므로 R&D 비용을 줄이려 한다. 당장 부도가 나려는 기업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해외 사례가 있다. 지금의 위기만큼이나 충격적이었던 1970년대 오일쇼크 때의 일이다. 프랑스에서 민간기업의 기술 개발이 극도로 위축됐다. 프랑스 정부도 공공부문 예산을 감축하는 등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러나 R&D 투자 예산만큼은 증액했다. 민간부문의 R&D 부족분을 정부가 감당했다. 프랑스는 이때 기초체력을 비축했기 때문에 1990년대 이후 기술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민간부문의 기술 개발 노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부문의 R&D 확대 외에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이러한 추세에 맞춰 산업기술 정책의 방향과 기조를 전환해야 한다. 특히 정부 R&D 정책의 공공성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정부와 민간 R&D가 경쟁이 아닌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 또 특정 기업이 아닌 특정 유망산업에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공공성 강화의 핵심이다.

이와 함께 정부는 미래 지향적인 R&D 기반 강화에 주력해야 한다. 과거와는 다른 개념의 정부 개입 정당화 모델이 필요하다. 정부 개입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일부 산업기술 정책 전문가들은 정부가 스포츠 경기의 심판 같은 역할에 그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같은 비상시에는 정부 역할을 감독이나 구단주 수준으로 격상시켜야 한다. 새로운 정책의 성공 여부는 제한된 재원을 현재가 아닌 미래의 문제 해결에 제대로 투자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종범 한국산업기술평가원 전략기획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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