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승호]무좀에 웬 비듬약?

  • 입력 2008년 12월 26일 02시 57분


9월 15일 리먼브러더스 사태 후 우리 금융시장은 빈혈과 동맥경화를 함께 앓아 왔다. 돈이 부족해 은행과 기업이 돈가뭄에 시달리는 것은 빈혈(유동성 부족)이다. 반면 돈의 흐름이 꽉 막혀 한국은행이 아무리 돈을 풀어도 그 돈이 기업으로 흐르지 않는 것은 동맥경화(신용경색)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금융시장에 처음 나타난 증세는 급성빈혈이었다. 금융기관에 외환과 원화가 함께 부족했고 국가의 외환지급능력에 대한 의구심도 발생했다. 이제 빈혈은 거의 해소됐다. 한미 통화스와프와 당국의 과감한 유동성 공급 덕분이다. 그러나 기업의 신용위험이 높고 옥석도 가려지지 않아 돈길이 막혀 있는 동맥경화는 여전하다. 심지어 한은이 돈을 풀면 그 돈이 은행권만 맴돌다 국고(國庫)로 되돌아오는 판국이다. 이로 인한 조직 괴사(기업 부도)의 위험은 날로 커지고 있다.

그런데 당국은 계속 빈혈 처방이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연거푸 낮추고 있는 것은 그 예다. 핏줄에 쌓인 콜레스테롤을 걷어내고, 필요하면 대체혈관을 끼워야 하는데 수혈만 한다. 무좀에 비듬약 쓰는 꼴이다. 금융위기에는 과감하고, 충분하며,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정책의 ‘강도’가 그래야 한다는 것이지 ‘아무 정책이나’ 동원하라는 뜻은 아니다.

막힌 혈관에 억지로 피를 주입하면 모세혈관이 터진다. 뇌중풍이다. 경제에서 일어나는 뇌중풍은 ‘유동성 함정’과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될 것이다. 침체로 인한 자산디플레이션과 그에 이은 하이퍼인플레이션, 섬뜩한 시나리오다.

은행의 자본 확충은 꼭 필요하지만 그 효력이 즉시 나타나지는 않는다. 기업에 온기가 전해지려면 아무리 빨라도 내년 중반은 돼야 한다. 한은이 기업어음(CP)을 매입해 직접 파이프를 꽂는 것은 말 그대로 상징적 조치일 뿐이다. 한은이 그렇게 처방할 수 있는 기업이 몇 개나 되겠는가. 모세혈관처럼 촘촘히 퍼져 있고, 개개 기업의 현실을 낱낱이 알고 있는 시중은행이 움직이기 시작해야 부실기업 정리도, 유동성 지원도 가능하다.

금융정책의 무게중심이 ‘양적 완화’에서 ‘질적 완화’로 빨리 옮겨와야 한다. 이동걸 금융연구원장은 “기업으로 돈이 돌게 하려면 보증기관의 기능을 확대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은행이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걱정하지 않고 대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년 예산에서 보증기관에 1조1000억 원을 출자하기로 해 보증여력이 10조 원 늘게 됐다. 이에 대해 이 원장은 “늘린 것은 반갑지만 이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보증여력을 적어도 50조∼100조 원 늘려야 과감하고 선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액 보증할 경우에는 은행이 돈을 헤프게 쓸 수 있으므로 90∼95% 부분보증을 통해 은행도 5∼10% 책임지도록 정책을 디자인하면 모럴해저드도 예방할 수 있다.

내년엔 13조 원의 감세가 예정됐다. 그러나 감세는 정부지출에 비해 경기부양 효과가 크지 않을 것 같다. 대출에 짓눌려 있는 납세자들은 깎아준 세금으로 은행 빚부터 갚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세할 재원의 절반이라도 동원해 보증기금들의 자본금을 확충해야 한다. 그것이 막힌 돈맥을 뚫고 부도대란을 차단하는 방법이다.

허승호 경제부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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