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윤덕민]北, 리비아의 核포기 배워라

  • 입력 2008년 9월 10일 02시 56분


‘영원한 적은 없다.’ 55년 만에 리비아를 방문한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와 회담한 직후 나온 말이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1986년 베를린 폭탄테러로 많은 미군이 희생되자 리비아에 대한 보복 폭격을 감행했다. 카다피 원수의 관저도 포함돼 그의 가족이 죽기도 했다. 미군이 폭격했던 바로 그 관저에서 라이스 장관과 카다피 원수의 역사적 회담이 열렸다. 영원한 적은 없다는 국제관계의 오랜 관행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회담이다.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은 2003년 10월 수에즈 운하에서 한 화물선을 적발한다. 화물선에는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 부품이 가득 차 있었다. 화물의 최종 목적지는 리비아였다. 2개월 후 카다피 원수는 모든 대량살상무기의 포기를 선언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전면적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통보했다. 또 고농축우라늄 생산을 통한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고 해외로부터 핵무기 설계도 등 관련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고 통보했다.

카다피 원수의 핵 포기 결단은 핵 비확산 노력에서 예상하지 못한 성과를 낳는다. 조직범죄 카르텔과 같이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국제 핵무기 밀거래 네트워크의 전모가 적발됐다. 파키스탄의 압둘 카디르 칸 박사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 밀거래 네트워크는 핵폭탄 설계도에서 생산기술, 생산설비 및 부품, 핵물질에 이르는 다양한 품목을 쉽게 구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슈퍼마켓에 비유될 정도였고, 더욱이 실시간 기술자문에도 응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었다.

궁지에 몰린 파키스탄 정부는 칸 박사로 하여금 리비아, 이란 그리고 북한에 대한 핵 유출 사실을 시인하게 한다. 더욱이 리비아 사찰 결과, 북한이 우라늄 농축 관련 물질을 제공한 사실도 드러났다. 리비아의 핵 포기가 북한에 불똥으로 떨어진 셈이었다.

북한은 미국이 자신을 압살하려 하고 털끝만 한 신뢰도 없기 때문에 핵문제는 단계적으로 접근하고 합의사항을 동시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지난 20년 가까이의 대북협상은 끊임없는 단계와의 싸움이었다. 소위 살라미 전술로 조금씩 핵문제 해결의 단계를 늘려왔다.

작년 초 2·13합의에서 핵시설 폐쇄→불능화및 신고→폐기라는 3단계 해법이 마련됐지만 현재는 2단계에서 협상이 교착됐다. 검증이라는 새로운 단계를 만난 것이다. 더욱이 신고의 대상에는 핵무기와 우라늄 농축이 빠져 있어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몇 단계가 또 필요할지 모른다. 문제는 핵문제가 단계를 밟아 진전해가기보다는 항상 원점에서 맴돈다는 점이다. 북한은 동결(불능화)을 해제하겠다고 다시 위협한다. 결국 북한은 핵을 포기하는 척은 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적대관계였던 미국과 리비아가 핵 포기 결단을 계기로 완전한 국교 정상화를 이룬 사례는 북핵 문제 해결에 있어 많은 시사점을 갖는다. 리비아는 핵 포기의 전략적 결단을 내리고 IAEA 사찰을 받아들여 완전한 핵 투명성을 보여 줬다. 이에 미국은 대사급 관계 정상화와 함께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리비아를 삭제하였다. 라이스 장관은 카다피 원수와의 회담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국에 영원한 적은 없다”고 지적하면서 “어떤 나라든 전략적 변화를 원하면 미국은 그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미국과 북한의 신뢰 부족 탓이 아니다. 리비아의 경우에서 보듯이 핵 포기의 대결단을 내린다면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준비가 국제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북한은 인식해야 한다. 또 카다피 원수는 혁명 이후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고집했지만 내년부터 시장경제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이 반드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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