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인숙]영광도 좌절도 끝이 아니다

  • 입력 2008년 8월 25일 03시 00분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아름다운 산문 중에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짧은 글이 있다. 무슨 일인가로 버스를 타고 가던 중인 작가는 거리 한복판에서 교통통제 상황을 맞이하고는 울컥 짜증이 일지만 이유가 마라톤 때문임을 알고는 설레는 마음이 되어 버스에서 내린다. 1등 주자에게 환호하고, 또한 그 환호로 당신의 생이 순간 활짝 뜨거워지기를 바라서였다. 작가가 보게 되는 모습은 힘겹게 대열의 끝을 쫓아 달리는 ‘꼴찌들’이었다. 작가는 그 순간의 심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금메달에 쏟아붓는 도덕적 찬사

“여태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그렇게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가슴이 뭉클하더니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는 이십등, 삼십등을 초월해서 위대해 보였다. 지금 모든 환호와 영광은 우승자에게 있고 그는 환호 없이 달릴 수 있기에 위대해 보였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모든 선수가 바라는 것은 금메달이다. 출전만으로도 기쁨이라는 말은 겸손하게는 들리지만 진심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스포츠는 선의의 경쟁이지만 메달 앞에서는 자신의 전생을 건, 모든 것을 건 전쟁이다. 내가 아니면 남이 이긴다.

메달을 따고 환호하는 선수를 볼 때 나 역시 내 온몸을 다 흔들어 환호하게 되지만 내가 그들의 기쁨을 충분히 느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의 고독과 고통에 대해서라면 더욱 그러하다. 최후의 승리가 보장되지 않은, 그러나 어쩌면 생에 단 한 번의 무대를 위해 감내해야 했을 고독한 고통은 사실 한순간의 승리보다 더 뜨거운 영광일 터이다.

그러나 패배하는 순간,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이 지나온 길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다. 올림픽에 출전조차 하지 못한 선수라면 더욱 그러하다. 패배하기 직전까지, 그들은 누구라도 그들의 무대에서 최고였을 것이다.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이다.

올림픽만큼 생의 정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벤트도 드물다.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는 모든 도덕적인 찬사를 쏟아 붓는다. 피나는 노력의 결과, 당연하게도, 금메달이 주어졌다는 식의 수사가 따라간다. 화려한 조명, 언론의 관심은 대부분 승자에게만 향한다.

관객의 환호는 사실상 자기 자신의 실제 인생에서는 이뤄지지 않는, 혹은 이뤄질 가망성이 없는 도덕적 인과관계에 대한 위로를 내포한다. 열심히 살다 보면 나도 인생의 금메달을 따는 날이 있겠지, 혹은 동메달이라도. 내가 아니면 내 자식이라도. 중계석의 아나운서가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든가 하는 식의 멘트를 신음처럼 내뱉을 때, 중계를 듣는 관객이 같이 신음을 내뱉는 이유도 그래서일 터이다.

환호 없이 달렸기에 위대한 그들

메달을 딴 선수에게 축하를 보내는 일은 아무리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준 크나큰 기쁨 때문에 축하는 고마운 마음에 얹혀진다.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에게 역시 마찬가지다. 그토록 노력한 결과를 이루지 못한 데 대해 위로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역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환호 없이 달려서 위대했다.” 마치 우리의 인생이 그런 것처럼. 좌절의 순간이 끝이 아님을 그들은 우리에게 일깨운다. 누군가는 4년 뒤에 다시 금메달에 도전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도 생의 정점은 다시 다른 곳에서 폭죽을 터뜨릴 터이다.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그러나 주목받기를 원하며 삶은 매 순간 자기만의 무대에서 폭죽을 터뜨린다. 금메달과 같은 찬란한 보상은 없더라도, 삶은 그렇게 이어지지 않겠는가.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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