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 칼럼]직접민주주의라고?

  • 입력 2008년 6월 23일 02시 57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라며 흔히 인용되는 것에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란 것이 있다. 엄격히 말해서 ‘인간은 폴리스(polis)에 사는 존재’란 뜻이다. 인간이 정신적, 도덕적, 지적 능력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뼈대가 폴리스란 것이다. ‘정치적’이란 서구어의 기원이 되는 폴리스는 본시 ‘자치 국가’란 뜻이다. 그러나 폴리스의 면적이 작고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도시국가로 번역해 쓴 것이 오랜 관행이다.

이 역어(譯語)의 부적절성은 서구의 고전학자나 고대사 학자들이 두루 지적하고 있다. 도시국가라고 할 때 시민 대다수를 점유한 시골의 인구를 간과하게 되고 마치 도시가 시골을 지배한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사실 폴리스는 규모가 작았고 가장 큰 아테네의 면적은 오늘의 룩셈부르크 공국과 비슷한 정도였다. 인구는 절정기에 25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여기에는 시민과 노예에 딸린 여성 및 아동이 포함되어 있다. 18세 이하의 연소자, 여성, 노예, 외국인 거주자를 뺀 정치 참여 시민 수는 한결 적어진다.

직접민주주의는 흔히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한다. 대의제도, 공무원 제도, 관료제가 없었고 광장의 시민집회가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시민이 참여하여 토론하고 투표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전쟁과 평화, 과세, 군대 소집, 전시 재정, 조약과 외교적 협상 등 모든 정책사항이 이 집회에서 결정되었다. 또 이 집회를 위한 예비 작업을 하는 부족 대표 50명의 평의원이 있었다.

소국가는 아마추어도 정치 참여

폴리스의 공무담당자 전원이 추첨으로 결정됐다. 1년 임기이고 평의원의 경우 그 누구도 평생 두 번 이상 복무할 수 없었다. 예외는 선출직인 10명의 장군 및 외교 교섭을 위한 특별위원회 임원 정도로 무제한으로 연임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공무담당자 사이에 상하 관계는 없었다. 추첨으로 평의원이나 배심원을 정한 것은 기회 균등의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간략한 서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직접민주주의에는 아마추어리즘이 내재해 있다. 모든 시민이 정부에 참여할 수 있으나 누구도 공무담당을 생계수단으로 간주할 수 없었다. 공무담당 때 받는 수당은 시민으로서의 소득 액수를 넘어서지 않았다. 아테네 같은 규모의 큰 폴리스에서는 당연히 한시적 아마추어 참여자들의 공무 집행을 조정하는 전업 정치인이 필요했다. 이들 정치인은 공무에 전념할 수 있는 부유층이나 토지소유자들로 충원됐다.

부유층의 독점이 무너진 것은 아테네의 쇠퇴기에 와서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인민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평결은 281 대 220이었다. 유의할 것은 배심원 501명 전원이 참석했다는 점이다. 열성적인 참여 또한 직접민주정치에 활력을 넣어준 것이다.

정치적 기복과 우여곡절을 겪지만 근 200년 동안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골격을 유지했다. 정치적 성공과 경제적 번영이 사회통합의 힘으로 작용했고, 강력한 시민적 자긍심과 폴리스와의 동일시를 가능하게 하였다. 직접민주주의는 소규모의 폴리스란 조건과 아마추어리즘이 통용되는 단순한 생활양식 때문에 가능했고 또 발전했다. 사실상 정치인을 의미했던 장군과 외교관계 특별위원회 임원이 임기 제한이 없는 선출직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단순했던 생활양식이 복잡해지고 진화하면서 폴리스는 쇠퇴하게 된다. 사회적 진보가 폴리스의 쇠퇴를 야기한다는 역설을 낳은 것이다.

전문성 필요한 현대엔 안맞아

참담한 실패작이라 비판받은 10년 전의 한일 어업협정이나 촛불 시위를 초래한 허술한 대미 쇠고기 협상에서 두드러진 것은 우리의 상대적 협상 아마추어리즘이다. 상대방에 비해 자세도 능력도 사전준비도 턱없이 빈약했다. 촛불 시위를 두고 대의제도 전 단계인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이라며 그 가능성을 높여 말하는 의견이 보인다. 눈에는 눈, 아마추어리즘에는 아마추어리즘으로 상대하자는 것인가? 아무리 비유적인 차원이라 하더라도 뒤돌아보기의 오도적인 언사는 피하는 것이 좋다. 부정확한 과거 참조와 그 부적절한 응용은 과거와 역사의 오용에 지나지 않는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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