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또 하나의 폭탄, ‘미친 교육’

  • 입력 2008년 5월 21일 03시 01분


10대들의 촛불시위는 2005년 5월에도 있었다. 2008학년도 새 입시제도가 처음 적용되는 고교 1학년생들, 이른바 ‘저주받은 89년생’들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서울 광화문에 모였다. 내신 위주의 입시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이들은 “내신 경쟁으로 고교 3년 내내 입시를 치르는 기분으로 학교를 다니게 됐다”고 성토했다.

차별 정서 자극하는 선동

당황한 정부는 진화에 나섰다. 당시 김진표 교육부총리는 “내신은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다”며 학생들을 다독였다. 이전까지 “내신이 중요하다”던 말을 뒤집는 발언이었다. 정치권은 긴장했다. 열린우리당은 홍보 부족 탓이라며 교육부를 질타했다. 10대들이 일단 거리로 몰려나오면 파괴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은 2002년 효순·미선 양 추모시위, 2005년 내신 입시 반대시위, 이번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시위를 통해 거듭 확인됐다.

지난주 토요일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촛불시위의 공식 명칭은 ‘미친 소·미친 교육 안돼! 촛불문화제’였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를 뜻하는 ‘미친 소’에다 ‘미친 교육’이라는 새 아이템이 추가된 게 눈길을 끈다. ‘미친 소’ 논란이 잦아들 때면 그 다음 전선(戰線)이 어디서 형성될지 시사하고 있다.

‘미친 교육’이란 지난달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학교자율화 계획’을 말하는 것이다. 일선 학교가 여건에 따라 0교시와 수준별 수업을 할 수 있고 방과 후에는 학원 강사를 초빙해 적은 비용으로 보충수업을 해준다는 게 이 계획의 내용이다. 좋게 보면 학교에 자율권을 부여하고 사교육비를 줄여보려는 방안이다.

그러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같은 단체들은 이번 계획이 학생들을 무한 경쟁으로 몰아넣는다고 보고 있다. 학원 강사를 학교에 들이는 것도 학교를 학원화하는 정책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두 가지 상반된 논리 가운데 전교조 쪽의 주장이 학생들에게 먹혀드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촛불 집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면 학교 급식에 먼저 사용된다고 보고 있다. 또 ‘우리는 공부하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쓴 피켓이 등장했다. 두 이슈 모두 학생들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학교자율화 계획 이외에도 이명박 정부의 교육개혁 조치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지역별 학력정보를 공개하는 방안이 곧 발표될 예정이고, 우수학교인 ‘자율형 사립고’를 포함한 고교 다양화 계획이 구체화되고 있다. 이런 정책들이 실행되면 ‘학력이 높은 지역’과 ‘낮은 지역’, ‘좋은 학교’와 ‘나쁜 학교’로 나눠질 수 있다. 차별을 당한다는 반감이 확산되면 운동단체로선 호기가 된다. 차별과 평등의식을 의도적으로 부추기는 마케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에 대한 본능적인 불안감을 건드린 ‘미친 소’ 못지않게 ‘미친 교육’ 문제는 학생 정서를 자극할 공산이 크다. 파괴력 면에서 오히려 쇠고기 파동을 능가할지 모른다. 전교조는 위원장이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 정면 승부에 나섰고 민주노동당은 0교시 등을 학생 인권 침해로 몰아갈 태세다. 여기에 새 정부 교육정책이 사교육비를 크게 늘리는 결과를 초래할 경우 더 나쁜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

이번 촛불 집회에서 불린 ‘되고 송’이란 노래는 운동 진영이 치밀한 전략을 갖고 학생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0교시 하면 3시간 자면 되고/점심시간에 미친 소 먹음 되고/그러다 머리에 구멍 나면 대운하에 뿌려지면 되고/….’

학부모 마음 얻어 철저 대비를

정부는 이런 선전선동에 푸념만 늘어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김도연 교과부 장관은 학교자율화 계획을 발표한 직후 일부 반발이 있자 “전 국민이 환영하고 좋아할 줄 알았다”고 말했다. 상대는 몇 수 앞까지 내다보고 있는데 답답한 현실 인식이다.

다행인 것은 교육정책의 콘텐츠만 놓고 보면 좌파 진영의 평준화 노선이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라는 점이다. 정부는 소외계층을 아우르는 정밀한 정책 집행으로 우선 학부모 마음을 붙잡아야 한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학습효과가 생겼다면 그걸 보여줄 차례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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