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최영훈]‘30년’ 즈음에…

  • 입력 2008년 5월 1일 19시 55분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훌쩍 30년이 흘렀다. 지난 토요일 오전 KTX를 타고 ‘홈 커밍 데이’ 행사에 참석하러 부산으로 갔다. 친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며 가다 보니 2시간 40분이 금방 지났다.

부산역에서 전세 버스로 갈아타고 모교로 향했다. 교정에 들어서자 뭔가 허전하다. 당연히 있을 것으로 여겼던 교문 위의 현판이 눈에 띄지 않는다. ‘낙오자(落伍者)는 과거를 자랑하고, 진취자(進就者)는 미래를 구상한다.’ 아치형 현판의 글귀도 자취가 없다. 언제 없어졌는지 아는 사람도 없다. 지각하지 않으려고 가파른 등굣길을 오르느라 숨을 헐떡이던 그 시절, 교정에 잰걸음으로 들어서는 나를 말없이 질책하던 글귀였는데….

2, 3학년 때 공부를 하던 덕형관은 옛날 그 모습으로 우리를 반긴다. 52년 전 준공된 이 원형교사는 모교의 상징 중 하나다. 덕형(德馨)은 덕이 향기처럼 피어난다는 뜻이던가. 지금은 교실로는 사용하지 않고 도서관으로 쓰인다.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지금은 머리에 희끗희끗 서리가 내린 친구들의 까까머리 모습도 떠오른다.

기념촬영을 하고 학교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강당 뒤편 ‘솔구’(솔방울로 하는 야구)를 하던 곳도 그대로다. 밤늦게까지 둘러앉아 문학을 논하고 개똥철학을 펴던 추억의 등나무 벤치도 여전하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구덕산 기슭의 교정을 둘러보면서 친구 부인들은 “대학 캠퍼스보다 낫다”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붉게 흐드러진 동백꽃이 운치를 더하는 해운대로 자리를 옮겼다. 행사에는 3학년 때 담임이셨던 선생님 다섯 분이 자리를 함께했다. 작고한 분도 있고 외국으로 떠난 분도 있다고 했다. 참석한 분들도 정년을 넘겨 모두 은퇴하셨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었던 선생님들의 30년 전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기자의 담임선생님은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가벼운 수술을 해서 당분간 약주를 할 수 없게 됐다”면서 아쉬운 표정으로 술을 따라주셨다. 졸업 후 박력이 넘치던 선생님의 집에서 조심스럽게 술잔을 받던 기억이 새롭다. 담임선생님이 유명을 달리했거나 사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친구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선생님들은 “○○○는 오지 않았느냐. 어떻게 지내느냐”고 제자들의 근황을 묻기도 하셨다. 이날 행사에 온 친구들보다는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오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다. 한창 바쁠 때라 그랬다면 언젠가 만나 아쉬움을 달랠 수 있겠지만, 회사를 그만뒀거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오지 못한 친구들도 있을 텐데…. 고단한 인생살이에 지쳐 보고 싶은 친구들도 볼 수 없는 그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또 쓰라렸을까. 쓴 소주를 들이켜며 아픔을 달랬을 법한 몇몇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즐거운 추억여행의 씁쓸한 뒤안길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스승의 날도 들어 있다. 부모님과 스승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고, 오래 묵은 우정도 더욱 소중히 여겨야겠다. 쏜살같은 30년 세월에 사라진 것도 있고 변한 것은 더 많다. 세월은 흐르고 또 흐를 것이다. 그래도 한 번 먹은 생각, 변하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새삼 무겁게 다가온다.

최영훈 사회부장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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