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상운]경찰이 더 무서워

  • 입력 2008년 4월 9일 02시 58분


서울 강서구 화곡본동에 사는 주부 이모 씨는 5일 경찰의 탐문수사를 받고 내내 불안했다.

오후 1시경 집까지 찾아온 사복 차림의 경찰은 “지난달 두 차례 발생한 초등생 납치미수 사건 때문에 탐문수사를 하고 있다”며 개인정보를 캐물었다. 갑작스러운 경찰의 방문에 당황한 이 씨는 어린아이들까지 돌보느라 신분증도 확인하지 못한 채 가족 수와 아이 이름, 전화번호를 순순히 불러줬다.

경찰이 돌아간 뒤 이 씨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혹시나 경찰을 사칭한 범죄자가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5일 강서경찰서 홈페이지에는 이처럼 경찰의 무원칙한 가택 탐문수사로 불안감을 느낀 주부들의 항의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경찰은 다음 날 홈페이지에 “근래 강서구에서 강력사건이 발생해 모든 형사가 목격자 여부 등을 가가호호 방문해 탐문수사 중에 있습니다. 협조를 부탁드리고, 형사를 사칭한 범인도 있을 수 있으니 신분증 확인을 철저히 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답글을 올렸다.

경찰이 먼저 신원을 밝히는 게 기본인데도 되레 시민들에게 신분증 확인을 요구한 것이다. 강서경찰서 관계자는 “최근 경찰 수사력에 대한 비판여론으로 위에서 강한 질책을 받고 급하게 수사를 하다 보니 신분을 확인해 주는 절차를 제대로 못 지켰다”고 해명했다.

경찰관직무집행법에 규정된 불심검문과 달리 가택 탐문수사는 형사소송법상 임의수사에 해당돼 피수사자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따라서 시민들은 경찰 신분 확인을 우선 요구할 권리가 있다.

강서경찰서는 지난달 19일과 28일 화일초등학교 남학생 두 명이 동일범으로 추정되는 괴한에 의해 납치될 뻔한 사실을 언론을 통해 알았다. 뒤늦게 수사에 나선 강서경찰서는 전체 40명의 형사 중 절반을 이 사건에 투입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유력 용의자 명단은커녕 현장에서 이렇다 할 증거 하나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한 경찰 관계자는 “가택 탐문수사는 사생활 침해 가능성이 있고, 효율성도 떨어져 최근에는 경찰 내부에서도 기피하는 수사방식”이라며 “수사가 안 풀리면 마지못해 택한다”고 귀띔했다.

경찰의 가장 큰 임무는 시민 불안을 없애는 것이다. 강력사건을 시급히 해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적법절차를 어기고 시민들을 불안하게 하는 수사는 그 목적마저 의심받을 수도 있다.

경찰 수뇌부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급할수록 원칙을 지키라’는 말인 것 같다.

김상운 사회부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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