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용희]세상과 통하는 문, 신문을 펼치자

  • 입력 2008년 3월 31일 03시 00분


아침에 눈을 뜬다. 현관에 나가본다. 아침, 찬 공기 속에 신문이 바닥에 누워 있다. 도시인의 하루는 신문 읽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얼른 신문을 집어 들고 냉큼 방안으로 들어온다. 어릴 적 아버지는 대문 앞에 가서 신문을 가져오도록 시키곤 했다. 그리곤 신문을 나무 마룻바닥에 양껏 펼쳐 한참을 들여다보곤 하셨다. 다 본 신문지는 재래식 화장실에 등장하곤 했다. 때로 신문은 가난한 집 방 안의 도배지나 장판을 깔기 전 속지가 되기도 했다.

정보 편식하는 포털과 달라

어느 땐 친했던 반 친구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나곤 했다. 집이 가난했던 친구는 자전거도 없이 새벽마다 100부가 넘는 신문을 돌렸다. 대학 다닐 때 대학신문사 기자였던 친구는 자신이 만든 신문으로 학우들이 자장면 그릇 싸는 것을 못 견뎌 했다.

신문과 신문지는 그렇게 자신의 일생을 마감한다. 첫새벽의 신선한 정보에서 시작해 도배지로 화장지로 그리고 마침내 자장면 그릇을 싸서 내버려지는 짧고도 격동적인 삶. 그러나 요즘 청년들은 시켜 먹은 자장면을 쌀 신문지조차 없다.

이들은 종이신문을 읽지 않는다. 이들의 아침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 뉴스로 시작된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보고 싶은 뉴스만 클릭한다. 검색어 순위들만 찾는다.

그러나 종이신문을 멀리하는 요즘 청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최근 뉴스가 있다. 미국 최고 학생 12인에 뽑힌 한인2세 이형진(패트릭 리) 군 이야기다.

예일대에 입학하게 된 이 군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독려로 신문 5, 6개를 집안 곳곳에 펼쳐 놓고 읽었다고 한다. 읽는 재미는 쓰는 능력으로 이어져 고교시절 교내 신문과 지역 신문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신문은 이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를 한꺼번에 부려놓는다. 보고 싶은 것과 보고 싶지 않은 것, 개별적 관심사와 관심사 밖의 것을 함께 담아낸다. 중요한 몇 가지만을 똑같이 뉴스 시간에 전하는 TV와 다르다. 개별적, 편향적으로 클릭하는 포털 사이트와 다르다.

신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와 이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는 최첨단의 척후병이다. 신문을 읽지 않는다면 시대와 역사의 현장에 설 수가 없다. 때로 정권에 대한 비판자거나 기존정치에 조력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신문은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를 진단하며 미래를 전망하는 시대의 발언자임에 틀림없다.

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청년들은 길을 걸으며 MP3를 듣고 전철을 타선 PMP로 영화와 텍스트를 본다. 종이문자가 점점 사라지는 시대, 한 백년이 지나 사람들은 신문을 고고학에서 찾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 도시인들은 언제나처럼 아침 현관문을 열며 신문을 찾을 것이다. 신문은 누군가의 신문고(申聞鼓)이고 동네 아낙의 우물가이기 때문이다. 신문은 우리 시대 여전히 매력적인 읽을거리다. 생각거리의 화덕이다.

인문학적 상상력의 전달자 되길

다만 이 시대 신문은 대책 없이 단순히 비판만을 즐겨서는 안 된다. 사실(fact) 제시에만 언론의 몫을 다했다 안주해서도 안 된다. 신문은 격변하는 문명의 현장에서 책임 있는 전망의 발화자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한국 신문은 정치 공방에 중요 지면을 다 소진할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유연함이 필요하다. 상상력을 선도하는 또 다른 상상력의 전달자가 됐으면 한다. 일테면 최근 두바이 발전 현장에 대한 진취적 기사가 그 좋은 예다.

1920년대 시인 김동환의 시에서처럼, 아침 도시인들의 꿈길을 밟고 와 가만히 머리 위에 물을 붓고 떠나는 북청 물장수처럼 신문은 맑은 물로 우리의 정신을 깨워준다. 그렇게 될 때 신문은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시가 될 것이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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