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이렇게 착한 국민인데…

  • 입력 2008년 3월 27일 20시 43분


“우리나라는 지금도 군주제 국가입니다. 왕이 잘못하면 목을 자릅니다. 요즘은 선거로 자르지만요.”

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그는 웃으면서 했다. 1월 초 방한했던 프랑스국제관계연구소의 티에리 드 몽브리알 소장 얘기다. 그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과 나이만 다를 뿐,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개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닮았다고 했다.

집권당 성적은 대통령 평가

그때만 해도 두 사람을 비교하는 건 덕담이었다. 지금은 더 같아질까 겁난다. 지난해 5월 당선 직후 지지도가 65%나 됐던 사르코지는 벌써 단두대 밑까지 갔다 왔다.

대선 한 달 반 뒤 치러진 총선에서 집권당은 신승이었다. 당초 압승하리라던 예상과는 딴판이다. 의석수는 과거 359석에서 345석으로 되레 줄었다. 독일 우파 신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 “오만해진 권력에 대한 경고”라고 했을 정도다.

이달 중순 지방선거 결과는 더 참담하다. 1959년 이래 최저 투표율에, 집권당 참패다. 프랑스 10대 도시 중 집권당이 이긴 곳은 2곳에 불과했다.

물론 집권당은 “후보 개개인에 대한 평가일 뿐”이라며 선거의 의미를 그야말로 평가절하 했다. 패자의 핑계와 남 탓은 세계 어디나 비슷하다. 그러나 야당 대선 후보였던 세골렌 루아얄은 “국민이 대통령을 응징했다”고 일갈했다. 세계 유력지의 분석도 다르지 않다. 총선이든 지방선거든,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집권당의 성적은 분명 대통령에 대한 평가다.

방정맞은 소리라면 차라리 좋겠다. 우리나라에선 막 18대 총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상태지만 사르코지의 패인은 이 대통령의 ‘예상 패인’과 너무도 비슷하다.

하나는 유명 연예인과의 지나친 애정 노출이고 또 하나는 경제 살리기 구호만 요란했지 개혁은 지지부진, 민생도 그냥저냥이었다는 점이다.

이 대통령은 하필 귀족적 이미지의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출신)에 빠져 인심을 더 잃었다. 프랑스에선 대통령에게 자제하라는 말을 감히 못했던 참모진 책임론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참모들이 더 펄펄 뛴다. ‘왕의 형님 문제’를 놓고 대통령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면서. 이쯤 되면 군주제 전통이 강한 나라, 우파 권력의 속성이 원래 그런 건지 개탄할 판이다.

그나마 사르코지는 “선거의 교훈을 배우겠다”며 진중한 대통령으로 돌아서고 있다. 개혁엔 흔들림 없다는 천명도 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 생산시장의 진입장벽 폐지 등 사르코지 정부가 추구하는 개혁은 선진국이 가야 할 길, 맞다. 당장의 고통은 따를지라도 길게 보면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데 이만한 처방이 없다. 사르코지의 지지율은 반 토막 났어도 총리 지지율이 높아진 걸 보면 프랑스 국민도 개혁 자체를 반대한 건 아니었다.

권력층의 모범과 인기는 그래서 중요하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참고 따르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거기서 나온다.

당신들 권력투쟁 더는 보기 싫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도 자발적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서 세계를 놀라게 했던 우리 국민이다. 일본 후쿠이 현 미쿠니 정 앞바다 기름 유출사고 때는 석 달간 30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몰려왔다지만, 우리는 석 달도 안 돼 100만 명이 달려가 내 집 닦듯 시커먼 기름을 닦아냈다.

우리가 과한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이 대통령의 7% 경제성장 공약은 대선 때 얘기고, 국민은 그저 5%대 정도면 된다는 게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다. 바보거나 냉소적이어서가 아니다. 글로벌 경제 환경이 나빠졌다는 것도 알고 선거 때면 으레 뻥치기 공약이 나오는 것도 안다. 속을 줄 알면서도 국민은 찍어줬다. 대안도 없지만,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착한 국민을 두고 그들은 10년 만에 잡은 권력을 어떻게 요리해 먹을까 권력 투쟁에 몰두하고 있다. “지금 민심이 심상치 않다”고 직언하는 측근이 없는 대통령은 불행하다. 그런 대통령을 보는 국민은 정말이지 복도 없다. 우리는 감동에 목말라 있다.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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