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 칼럼]문화실천의 위대함

  • 입력 2008년 3월 24일 03시 00분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지 100년이 된다. 그래서 현대시 100년을 기념하는 갖가지 기획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책 읽기 운동과 나란히 시 읽기 운동을 벌이는 것은 필요하고 적정한 일이다. 말의 오용이 사납고 막말과 상소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좋은 시 읽기는 세련된 언어 구사와 인품 도야에 기여할 것이다. 논어에는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제대로 말할 채비를 갖추지 못한다’는 대목이 보인다. 시를 알지 못하면 말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어느 문화에서나 시는 말의 진수요 알맹이기도 하다.

1920년대에 본격적으로 출발한 20세기 한국시는 처음부터 두 갈래 기본 충동을 갖고 있었다. 광의의 현실변혁 충동과 ‘부족 방언’ 순화 충동이 그것이다. 전자는 문학의 계몽적 기능을 강조하면서 지사비추(志士悲秋)의 정신으로 시를 키웠고, 후자는 우리말의 표현 가능성 탐구와 세련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문학사의 문서가 되었다고는 하나 최남선 시편은 오늘날 끝까지 읽어내기가 힘들다. 조잡하고 미숙하고 황당하다. 그로부터 불과 한 세대 후에 가령 ‘청록집’ ‘귀촉도’ 같은 시집이 나왔다는 것은 하나의 문학적 경이다. 되다 만 습작 수준에서 출발해 주옥같은 시편을 낳기에 이른 것이다.

일제 때 시인들 민족어 갈고닦아

이 같은 문학적 경이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극한 민족어 사랑이다. 식민지 상황이라는 정치적 불우가 도리어 문학적 행운의 계기가 됐다. 부족 방언 순화에 역점을 둔 시인들은 일부에서 현실도피라고 비판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쪽의 대표적 시인 정지용은 “언어미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란 말을 남겨 놓고 있다. 이 아포리즘은 민족과 민족어에 대한 신앙고백이면서 동시에 그의 시적 이상을 드러내는 시론이기도 하다.

언어미술은 언어예술을 바꿔 써 본 것으로 시를 가리킨다. 민족어로 된 시가 존속하는 한 그 민족은 쇠하지 않고 번창하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시적 진술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진술이기도 하다. 그 정치적 함의는 너무나 분명하다. 민족어로 시를 쓴다는 것은 문화적 민족주의의 단적인 표방이요 실천이었다. 학교 교육에서 일본어가 ‘국어’이고 모든 교지(校誌)가 일본어로 돼 있던 시절에 민족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한 문학적 선택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기도 했다. 이것은 당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국면이다.

“의혹의 날에도 조국의 운명을 생각하고 괴로워하던 날에도 그대만이 나의 지팡이요 기둥이었다. 아! 위대하고도 힘차고 참다우며 자유로운 러시아말이여!” 하고 만년의 투르게네프는 타향에서 노래했다. 러시아문학 전문가의 말을 따르면 이 산문시는 러시아의 토박이말로만 구성돼 있다고 한다. 민족어 순화에 노력한 우리 시인들에게 우리말은 투르게네프에게 러시아말이 갖고 있던 것과 꼭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시인의 집중된 노력의 결과 우리말은 전례 없는 유연성과 섬세함을 얻게 됐고 그것은 광복 이후 문화 발전의 견고하고 든든한 초석이 되었다.

민족어로 글을 썼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광복 이전 문화실천은 동시에 정치실천이기도 했다. 그리고 국내 거주자에 관한 한 문화실천은 정치실천에서 한결 풍요한 성과를 거둔 게 사실이다. 이것은 국내 정치실천을 과소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다. 성질상 직접적인 정치실천은 문화실천보다 한결 중층적인 억압과 통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비해 본원적 문화실천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수행될 수 있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치실천만 중시 땐 역사 왜곡

광복 이후 격렬한 정치실천의 역사는 정치실천을 중시하고 우선시하는 암묵적 관점과 관행을 낳게 했다. 민주화 투쟁 같은 정치실천이 낳은 가시적 성과를 목도한 세대에게 정치실천의 중요성과 우위성은 당연지사로 간주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정치실천 중시의 관점을 모든 시대와 분야에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자칫 역사적 사실의 왜곡으로 귀결되기가 쉽다. 우리는 매사에 섬세하고 유연한 척도를 설정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파악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섬세하고 유연한 언어 구사와 음미를 종용하는 시와 문학 부문에서도 균형 잡힌 과거 이해는 중요하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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