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최영해]지식 도둑과 ‘아너 코드’

  • 입력 2008년 3월 4일 02시 59분


지난해 5월 미국 동부의 명문 사립대인 듀크대 비즈니스스쿨이 발칵 뒤집혔다.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밟고 있던 아시아계 학생 9명이 남의 리포트를 베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담당 교수가 바로 진상 조사에 나섰다. 이들이 낸 리포트가 서로 엇비슷했다. 학생들이 리포트를 작성하면서 교수로부터 미리 허락을 받지 않고 서로 ‘협동’했다는 것이다. 담당 교수는 이들이 학교의 ‘아너 코드(Honor Code·명예규약)’를 위반했다고 판정했다. 이들은 모두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아너 코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잘못을 인정한 한국 학생 3명에겐 1년 정학 조치가, 끝까지 “리포트를 베끼지 않았다”며 잡아뗀 중국계 학생 등 6명에겐 ‘퇴학’ 처분이 내려졌다.

열 달이나 지난 일인 듀크대 MBA생 얘기를 꺼내는 것은 박미석(숙명여대 교수·가족자원경영 전공) 대통령사회정책수석비서관을 둘러싼 논문 표절 의혹이 결코 간단치만은 않은 사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에서 아너 코드는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마지노선 같은 기준이다. 표절의 범위도 아주 넓다. 비단 석·박사 같은 학위 청구 논문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교수가 수시로 내주는 과제물에서도 아너 코드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다른 사람의 글을 무단으로 옮겨 놓는 것은 물론이고 타인의 말이나 생각, 아이디어를 흉내 내는 것도 ‘지식 도둑질’로 불린다. 논문 데이터를 위조하거나 모방한 데이터를 오도하면서 해석하는 행위는 악질에 해당된다. 심지어 부정행위를 하는 사람을 도와주거나 이런 부정행위를 조사하는 사람에게 고의로 잘못된 정보를 주는 것 또한 아너 코드 위반이다(노스캐롤라이나대(UNC-채플힐)의 아너 코드).

UNC 영문과의 유나 리 교수는 “인용한 서적과 자료, 저자 이름을 밝히더라도 세부적인 인용 원칙을 꼼꼼하게 지키지 않을 경우 표절 행위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아너 코드를 어기는 것은 학문을 하는 사람에겐 돌이킬 수 없는 수치다. 또 ‘지식 도둑’에 대해서는 가혹한 징계가 뒤따른다. 표절은 ‘중대 범죄’다.

박 수석의 논문이 의혹을 받는 대목은 제자의 논문과 똑같은 데이터를 사용하고 유사한 결론을 냈지만 제자 논문에 대해선 어떤 언급도 없다는 점이다(2002년 8월 대한가정학회지 제40권 8호). 한국노년학회지에 제자와 공동으로 낸 논문과 비슷한 제목의 논문이 불과 18일 뒤 다른 학회지에는 박 수석 이름만 올라와 있다(2004년 11월 3일 대한가정학회지). 여기다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의 논문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2006년 여름에도 박 수석 논문은 표절 논란을 비켜 가지 못했다.

박 수석은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석사(1986∼87년)와 박사(1987∼92년) 공부를 한 49세의 중견 학자다. 그가 맡은 대통령사회정책수석비서관 자리는 수시로 부처 장관 및 차관과 함께 머리를 맞대면서 업무 협의를 해야 한다. 여기다 청와대 비서관과 부처 공무원까지 진두지휘해야 한다. 박 수석 말대로 “절대 표절이 아니다”라면 세간의 의혹을 명쾌하게 풀어줘야 할 책임이 그에게 있다. 해명이 지지부진하다면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실은 진상 조사에 나서는 게 이치에 맞다. 민정수석실에 그만한 전문가가 없다면 중립적인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꾸려 표절 여부를 따져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다.

최영해 산업부 차장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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