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예술의 전당 20년과 역대 대통령

  • 입력 2007년 11월 29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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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서초동 우면산(牛眠山) 자락의 예술의 전당에 갈 때마다 역대 대통령과 문화 예술의 관계를 떠올리게 된다. 특히 군(軍) 출신인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이 예술의 전당 건립 및 발전의 초석을 닦은 사실이 흥미롭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예술의 전당은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건축물을 사랑한 두 대통령

전 대통령은 퇴임 열흘 전인 1988년 2월 15일 일단 음악당과 서예관 개관 테이프를 끊어 예술의 전당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노 대통령 역시 퇴임 열흘 전인 1993년 2월 15일 서둘러 오페라하우스 개관식을 거행했다. 두 대통령은 예술의 전당 건립이 자신의 주요 치적으로 기록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사랑한 것은 문화 예술이 아니라 건축물로서의 예술의 전당이었을 뿐이다.

건축가 김석철이 설계한 예술의 전당은 현재 음악당 오페라하우스 한가람미술관 등 7개의 공연 전시 교육시설을 갖추고 있다. 연간 2500여 회의 예술행사가 열리고, 200만 명의 관람객이 드나든다. 자정 가까이 앙코르 곡과 팬 사인회가 이어지는 날도 있다. 하지만 1984년 11월 착공 때만 해도 관계자들은 “과연 이 산골까지 관객이 찾아올까”를 고민했을 정도로 외진 곳이었다.

예술의 전당은 개관 20주년을 석 달여 앞둔 16일 20주년 기념행사 로고와 슬로건 ‘뷰티풀 라이프(Beautiful Life)’ 선포식을 겸한 콘서트를 열었다. 노무현 대통령 내외와 국무위원, 역대 예술의 전당 사장 및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초청된 뜻 깊은 자리였다. 초청 인사들은 아시아 굴지의 복합 문화 예술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예술의 전당의 성장에 가슴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한 관객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예술의 전당이다”고 말할 정도다.

20년간 전당에서 빚어진 에피소드도 적지 않다. 2001년 어느 날 오페라하우스 1층 로비에 철가방을 든 중국집 배달원이 나타나 “자장면 시키신 분”을 외쳐 대는 바람에 직원들을 경악하게 했다. 2004년 소프라노 바버라 보니 내한 공연 때는 50대 여성이 콘서트홀에 애완견을 몰래 데리고 들어갔다가 주변 사람들의 항의로 적발된 엽기적 사건이 발생했다.

2005년 여름 ‘오페라의 유령’ 공연 때는 어린이가 입장을 못하게 되자 30대 초반의 어머니가 문을 붙잡고 40여 분간이나 고함을 치며 소동을 벌이는 바람에 문을 연 채로 공연이 시작됐다. 강아지를 데리고 콘서트홀로 들어가려던 귀부인을 제지하자 “이 강아지는 나와 늘 클래식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웬만한 관객보다 낫다”며 소동을 부린 적도 있다.

2001년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은 지휘자인 쿠르트 마주어가 첫날 공연 후 심장 통증으로 다음 날 연주에 차질을 빚는 바람에 전당 측이 전 세계를 수소문해 마침 일본에 와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상임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를 찾아내 대신 지휘봉을 맡기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2002년 6월 세계적 안무가인 나초 두아토가 이끄는 스페인국립무용단은 공연 첫날 벌어진 한국과 스페인의 월드컵 축구 8강 대결로 고작 150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유감스럽지만 문민(文民) 대통령 중에도 진정한 문화 예술 애호가는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명성황후’와 신년음악회 참석을 위해 두 번,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서울총회 기념공연과 송년음악회 미술전시 관람 등을 위해 세 차례 예술의 전당을 방문했을 뿐이다. 노 대통령도 두 번에 그쳤다.

문화의 향기 흐르는 정치는 언제

솔직히 제17대 대통령 주요 후보 중에도 문화 마인드가 있어 보이는 인물은 없다. 어쩌겠는가. 우리 정치가 아직 그 정도 수준인 것을. 다만 차기 대통령은 좀 더 자주 예술의 전당에 들러 국사(國事)에 지친 머리를 식히면서 문화 예술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나라의 격(格)이 올라가고 정치와 사회도 훨씬 부드러워질 것이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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