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화합의 정부’를 기다리며

  • 입력 2007년 11월 26일 19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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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 등록이 끝난 어제, 몇몇 사람에게 물었다. “김영삼은 ‘문민정부’,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 노무현은 ‘참여정부’라고 했는데 당신이라면 차기 정부를 무슨 정부라고 하겠는가.” 열에 아홉은 주저 없이 ‘화합의 정부’라고 답했다. 우리 사회가 지난 5년간 워낙 찢어지고 갈라져서 누가 대권을 잡든 하나로 묶는 일이 시급하다는 얘기였다.

맞는 말이다. 대선을 앞두고 이처럼 사분오열되기는 처음이다. 대선 후보만 역대 최다인 12명이다. 숫자가 다는 아니지만 분열의 정도를 보여 주는 단서는 된다. 좌파야 원래 그렇다지만 우파까지 쪼개질 줄이야. 이래서는 대선이 끝나도 갈라진 상처가 아물기 어렵다. 게다가 넉 달 후면 총선이다. 또 한 차례의 대분열과 이합집산이 기다리고 있다.

총선 후는 또 어떻고. 대선 낙선자 한두 명을 중심으로 강고한 비토세력이 형성돼 사사건건 새 정권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래 5년 주기로 되풀이되고 있지만 이번 대선에서 유독 불길하게 감지되는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일까. 정치를 화합과 통합의 모드로 바꾸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은 대선 후보들부터 분열을 부추기지 않아야 한다. 이념의 차이를 과장해 상대를 ‘극단주의자’나 ‘사이비’로 낙인찍는 일은 피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이번 대선의 다자(多者) 구도도 ‘이념의 분화’와는 아직 거리가 있다. 서구(西歐)처럼 시민사회가 먼저 이념적으로 분화되고, 그 반영으로 정당들이 생겨서 다수 후보가 출마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후보 간 理念 차이, 과장 말아야

따라서 유력 후보들 간에 본질적인 이념의 차이는 결코 크지 않다. 이명박 이회창 정동영 모두 한미동맹의 유지, 남북관계의 단계적 개선, 중산층과 서민 중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지지를 표방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둬야 한다. 그래야 대선 후라도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주류(主流)의 정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

유권자 또한 화합형 리더를 가려내야 한다. 군림형 대통령보다는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해 낼 수 있는 선의(善意)의 중재자형 대통령이 요구되는 시대다. 100% 완벽한 후보란 없다. 현실의 제약 속에서 상대적으로 나은 인물을 선택하면 된다. ‘정치에서 최선은 차선의 적(敵)’이라고 했다. 존재하지 않는 ‘최선’에 집착하면 무리수를 두게 마련이다.

차제에 5년 주기의 이 대선병(病)을 치유할 근본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나는 민주화 이후 20년 동안 한국 정치를 끌고 온 동력은 ‘두려움’이었다고 생각한다. 승자독식체제 아래서 내가 속하지 않은 지역, 내가 지지하지 않은 후보가 승리했을 때 받을지도 모를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이 내밀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동인(動因)이었다는 뜻이다.

이 ‘두려움’ 덕분에 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고, 당선의 문턱에서 눈물을 삼킨 사람도 있다. 때로는 “OOO가 당선되면 OO지역 출신 공무원들은 끝이다”는 식으로 암암리에 두려움을 조장한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후보들 주변에 몰려 있는 수십, 수백 명에 이르는 참모와 자문그룹만 해도 어느 날 점령군이 돼 들이닥칠 텐데 누군들 두렵지 않겠는가.

관료사회뿐이겠는가. 민간 기업의 소소한 인사에까지 그 여파가 미친다. 그러니 두려움은 증오가 되고, 증오는 다시 정권에 대한 불복(不服)으로 바뀌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결국 누가 정권을 잡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 자리엔 반목과 대립만 자란다.

두려움과 증오의 악순환 끊어야

그간 정치권과 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4년 중임제나 대선 결선투표제가 대안으로 제시됐지만 그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더 큰 틀에서의 화합의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 화합을 위해서는 자기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지도자와 함께 정말 우리 몸에 맞는 사상과 체제를 찾아 냄으로써 풀어야 한다.

서구 모델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면 우리의 정치 문화, 역사, 전통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오래전부터 일단의 정치학자들은 신라 3국통일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던 원효(元曉)의 화쟁(和諍)사상에서 국민 화합의 해법을 찾고 있다. 참고가 될지도 모르겠다.

다자 구도의 대선 앞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리더를 소망한다. 그런 리더라야 탕탕평평(蕩蕩平平), 화합의 정부를 꾸려 갈 수 있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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