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흘러간 물도 물레방아를 돌린다?

  • 입력 2007년 11월 1일 20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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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율을 10%포인트만 올릴 수 있으면 영혼도 팔겠다’는 사람이 늘어선 요즘이지만 불과 2주 만에 지지율을 60%포인트 이상 올린 희한한 경우가 있다.

2002년 프랑스 대선. 4월 21일 실시된 1차 투표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19% 남짓을 득표했다. 그러나 5월 21일 결선투표(프랑스는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지 않으면 1차 투표 1, 2위가 결선을 치른다)에선 무려 82%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장마리 르펜 국민전선(FN) 당수 때문이었다. 1차 투표 하루 전날까지만 해도 그해 대선은 우파의 시라크 대통령과 좌파인 리오넬 조스팽 총리의 양자 대결 구도였다. 하지만 1차 투표 뚜껑을 열어 보니 어이없게도 조스팽 총리(16%)가 주류 정치권에서 ‘왕따’인 극우파 르펜 당수(17%)에게 밀린 것으로 나타났다. 조스팽 총리가 1차 투표 통과를 기정사실화하며 결선투표에 주력했던 게 패착이었다.

급해진 것은 프랑스 유권자들. 자칫 인종차별주의자이자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인 르펜에게 정권이 돌아갈 판이었다. 결선투표에서 시라크 대통령에게 몰표가 쏟아진 것은 ‘르펜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8월 경선 이후 지금까지 지지율 50% 이상을 유지하는 것은 민주화 이후 한국 대선에서 유례없는 일이다. 여기엔 ‘노무현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다. 다시는 무능한 포퓰리즘 정권이 들어서서는 안 된다는.

역설적으로 이 후보의 고공 행진에 노 대통령이 크게 기여하는 셈이다. 노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 후보를 공격하지만 대선 구도로 보면 노 대통령은 이 후보의 적이 아니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오히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가 유탄을 맞는 구조다.

이런 이명박 탄탄 구도에 첫 균열음이 들렸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등장이다. 일각에서는 이 후보의 유고(有故)에 대비한 ‘스페어 후보’라는, 자동차 타이어에나 쓸 법한 논리까지 들이대고 있다. 자존심 강한 이 전 총재가 반기지 않을 얘기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이 전 총재가 감행할지 모를 ‘대선 3수(修)’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한국 정치의 구조에 있다.

1995년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에서에서 시라크 대통령에게 역전패 당한 조스팽 총리에게는 2002년 한번의 패자부활 기회가 주어졌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재검표 논란 끝에 연방대법원 판결로 패한 민주당 앨 고어 후보는 최종 집계 결과 총득표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에게 54만 표가량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그에겐 패자부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정상적인 나라에선 상상하기 힘든 대선 3수가 벌어지는 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몫이 크다. 그의 집권으로 대선 3수는 ‘금기 리스트’에서 빠졌다. 이 전 총재까지 출마를 선언하면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 이인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까지 대선 3수생만 3명이다. 이 전 총재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긴 DJ가 이 전 총재에게 정치적 재기의 여지를 남겼다는 점은 아이로니컬하다.

하지만 이번 대선 구도를 흔드는 노 대통령과 이 전 총재, DJ는 지난 두 번 대선의 라이벌들이었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데, 한국의 흘러간 물은 잘도 물레방아를 돌린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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