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상영]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입력 2007년 11월 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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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는 한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내전에 휩쓸려 반대파를 집단 학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습 공격으로 마을을 장악한 공화파는 마을 광장에서 반대파 주민들을 한 명씩 살해해 낭떠러지에 던지다가 그마저 싫증을 느끼고 한꺼번에 무참히 학살한다. 사흘 뒤 반대파가 마을을 탈환하고 보복 살인은 반복된다.

스페인 좌파정권 과거사 들추기

소설의 배경이 된 스페인 내전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벌어진 공화주의와 극우 국가주의(파시즘)의 싸움이었다. 공화주의는 호전적 무정부주의라는 극단적 형태로 표출돼 극우파와 격렬하게 충돌했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공화파에는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가 섞여 있었고 국가주의 쪽에는 가톨릭교회와 군부세력이 있었다. 온 나라에 증오가 넘쳐 서로를 잔인하게 죽였다. 양측 합해 100만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된다.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이다.

내전은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났고 프랑코 장군의 기나긴 독재가 이어졌다. 1975년 프랑코가 죽자 민주화의 훈풍이 불어 왔다. 이때 스페인 정치권은 이른바 ‘침묵 합의’라는 것을 도출해 냈다. 내전 당시의 잔학상은 물론 사후처리 문제 논의도 금기시했다. 이런 의도적인 역사의 망각을 통해 스페인은 분열의 위기를 넘기고 현대적인 민주국가로 탈바꿈한다.

70년이란 세월이 부족했을까. 지난달 7일 스페인 집권 사회당은 군소정당과 함께 내전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법 제정에 합의했다. ‘침묵 합의’가 깨진 것이다. 이어 31일 의회를 통과한 법안의 명칭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기억법’이다.

하지만 정치권이 과거 역사를 들추는 일이 역사학자의 평가와 같을 수 없다. 보수 야당인 인민당은 “사파테로 총리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여론도 갈라졌다. 법 제정에 찬성하는 여론은 50%에 못 미쳤고 30% 정도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기 싫다고 했다. 28일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내란 중 희생된 가톨릭 교인 498명을 시복(諡福)해 스페인 정부에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스페인 좌파는 1939년 내전 패배 이후 기나긴 굴욕을 겪었다. 우파 희생자들은 가톨릭교회에 의해 차례로 순교자로 인정받고 안장됐지만 좌파 희생자들은 암매장된 채 방치됐다. 그리고 드디어 정권을 잡았다. 한을 풀 기회가 온 것이다. 따라서 현 집권 여당이 말하는 명예회복이란 주로 좌파 희생자를 염두에 둔 것이다.

역사는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스페인이 내전 때 생긴 상처와 환부를 수술하지 않고 잊어버리는 쪽을 택함으로써 국가 분열을 막고 번영의 초석을 놓았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사이 세월이 흐르면서 진물이 흐르던 상처에는 생살이 돋아났다. 이제 와서 생살 밑의 곪았던 부위를 다시 살피려면 아픔이 없을 수 없다. 공화파였건 파시스트였건 부모 세대의 잔학상을 되돌아봐야 한다.

정략 따라 춤추는 갈지자 평가

역동적인 일류 국가로 거듭난 이 시점에서 70년 전의 과거를 정치적으로 들추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인지, 진정한 화합을 이루기 위해선 제대로 된 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명분이 새로운 분열을 잉태하는 모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지는 참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분명한 것은 정치권 주도의 과거사 평가는 현재의 정치역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가는 역사학자의 몫일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미국인 주인공은 공화주의라는 이상을 위해 타국의 내전에서 싸우다 죽는다. 하지만 70년 전의 비극적인 동족상잔을 오늘날 끄집어내는 정치인들에게는 이상보다는 현실이 우선일 것이다. 그들에게 한 번 물어볼 일이다. 과연 종은 누구를 위해 울리는가라고.

김상영 편집국 부국장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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