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별]최홍규 관장의‘인생 지침서’ 연극배우 박정자

  • 입력 2007년 10월 27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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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신의 아그네스’에서 원장 수녀 역을 맡았을 때의 박정자 씨. 동아일보 자료 사진
연극 ‘신의 아그네스’에서 원장 수녀 역을 맡았을 때의 박정자 씨. 동아일보 자료 사진
최홍규 관장
최홍규 관장
《어릴 적 성탄절만 되면 나는 갑자기 크리스천이 되곤 했다. 배고팠던 시절 교회에서 주는 간식도 탐이 났지만 성탄절 공연이 내게는 더 큰 즐거움이었다. 북한산 자락에서 태어난 나는 워낙 작은 마을이라 조금만 용기를 내면 교회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교회는 나의 작은 끼를 펼칠 수 있는 유일한 무대였다. 인사말부터 시작해 1인 다역을 했던 나는 내가 없으면 공연이 안 될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 외에는 별다른 재주가 없던 나는 어린 마음에 성탄절만 가까워지면 마치 스타인 양 우쭐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연기 교육을 받았다면 지금쯤 중견 연기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만큼 지금까지도 배우라는 직업은 내게 동경의 대상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배우의 길을 택하지 않을까 싶다.》

세월은 흘러 철물점 주인으로서 생활에 충실하던 1995년 어느 날, 나를 최가 아저씨라고 불러 주는 피아노 연주자 노영심 씨를 통해 배우 박정자 선생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지금도 나는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객석에서만 바라보던 그분을 만나는 순간 나는 뒷머리를 망치로 한 방 맞은 듯했다.

‘무대 위의 박정자’는 항상 카리스마 넘치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이며 그래서 늘 큰 산처럼 여겼던 분이 아닌가. 그런데 마치 상대에게 허를 찔린 것 같은 허망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전혀 50대로 보이지 않는 하얀 피부와 다정다감한 목소리, 작은 체구의 여성스러움은 나를 혼돈 상태로 빠뜨렸다. 과연 이분이 내게 그렇게 큰 산으로 느껴지던 박정자 선생이란 말인가. 내 나이 30대를 마감할 즈음 선생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분과의 만남은 나로 하여금 연극에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기회를 갖게 했다.

순수한 연극배우, 정통 연극배우, 신들린 여자, 카멜레온, 팔색조…. 박 선생에게 종종 붙는 수식어들이지만 이 어떤 수식어도 그 앞에서는 무색해진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 그 에너지를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내 어릴 적 많이 듣던 ‘대형 배우’라는 말이 나는 그게 어떤 의미를 뜻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박 선생을 만나면서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박 선생이 무대에만 서면 무대가 꽉 찬 느낌을 받는다.

인사를 나눈 후 처음 본 그분의 연극은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였다. 강한 개성을 가진 박 선생이 주책이 심한 이 엄마를 어떻게 소화할까. 그때부터 연극의 관전 포인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페드라’는 광기 어린 열정과 섬세한 여성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표현할까. 근엄하고 권위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면을 보여 주는 ‘신의 아그네스’의 원장 수녀 역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19 그리고 80’의 할머니 역을 또 어떻게 그려 낼까….

그분의 연극을 볼 때마다 나는 늘 감탄한다. “아, 연극배우 박정자는 물과 같구나. 어느 그릇에 담아도 담겨지는구나.”

나는 ‘배우 박정자’만큼이나 ‘인간 박정자’도 존경한다. 내가 그분을 만나면서 배운 것은 ‘사람’이다. 박 선생 곁에서 오랫동안 우정을 나눠 온 주변 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넓은 교류의 폭에 놀란다. 연출가 김정옥, 임영웅 선생님을 비롯해 이병복, 강부자, 손숙 씨 등 말씀만 들어도 주눅이 드는 어른들에서부터 가수 노영심, 이문세 씨 등 훨씬 연하의 사람들과도 두터운 친분을 과시한다. 특히 연하의 남자를 좋아하시는데 사진작가 김용호, 최정환 변호사 등은 모두 나의 친구이자 ‘라이벌’들이다. 참고로 같은 침대를 쓰고 계신 분도 연하의 남자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도무지 흐트러짐 없는 자기 관리도 경탄을 자아낸다. 가끔 쇳대박물관에서 예술인들이 파티를 열 때가 있다. 분위기가 워낙 흥겨워 참석자들이 평소에 볼 수 없던 모습도 보이는데, 박 선생은 그런 것이 없다. 목소리도 태도도 얼굴도 항상 평소와 똑같다.

노래를 할 때 화끈한 강부자 선생은 ‘앙코르’를 계속 받는데 박 선생은 딱 한 번으로 끝낸다. 사람은 가끔 실수도 해야 하는데 너무 냉정하니까 그런 점에서는 얄밉기도 하지만 저런 모습이 당대 최고의 연극배우 박정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 오랜 기간 무대에 서면서도 단 한 번도 스캔들이 없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박 선생은 친하다고 무조건 다 받아 주는 것은 아니다. 만약 아니다 싶을 땐 찬바람이 불 정도로 단호하다. 선생이 낮은 톤으로 “최홍규 씨” 하고 부르면 지금도 난 순간적으로 긴장한다. 내가 뭘 잘못했나. 가끔은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호되게 야단을 칠 때도 있다. 섭섭할 때도 있지만 그게 나에 대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그는 따뜻하지만 그런 만큼 정확하고 차가움도 갖고 있다. 그런 박 선생을 존경한다. 아니 사랑한다.

박 선생은 오십줄에 들어선 내게 그야말로 인생의 지침서다. 10여 년이란 나이 차는 우정과 사랑에 있어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줬고 사람이 어떻게 나이를 먹어 가야 하는지, 자신에게 어떻게 엄격해져야 하는지를 항상 일깨워 주신다. 그런 만남을 통해 나는 ‘철물장이’로서 더욱 성숙해짐을 느끼니 이만한 복과 행운이 또 어디 있을지 싶다.

최홍규 쇳대박물관장

■“최 관장은 삶 즐길줄 아는 사람”

“인생의 멋을 아는 멋쟁이 젊은 친구예요.”

최홍규(50) 관장의 ‘찬사’ 내용을 일부 전해 들은 박정자(65) 씨는 특유의 저음으로 최 관장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최가 철물점’을 하는 젊은이라고 오래전부터 좋은 말을 많이 들었어요. 굉장히 멋쟁이다, 삶을 즐길 줄 안다…. 그 멋쟁이를 언제 한번 만나나 기다리던 차에 10여 년 전 (노)영심이한테 소개받았죠.”

처음 박 씨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상호 ‘최가 철물’이었다.

“‘최가’, 그 말이 딱 맘에 들어오더라고요. 이가 박가… 이런 표현은 옛날 표현이지 요즘은 안 쓰잖아요. ‘이 사람 뭔가 멋을 아는군’ 싶었죠.”

막상 만나 본 ‘젊은이’는 멋지기만 한 게 아니라 속이 꽉 차 있더란다.

“욕심도 있으면서 자신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고 자신감이 있고 그러면서도 겸손하고….”

2006년 6월 박 씨는 연극인복지재단의 기금 마련을 위해 사회 각계 인사들이 출연하는 ‘당나귀 그림자 재판’이라는 연극을 기획했다. 박 씨는 최 관장에게 호소문을 낭독하는 역할을 맡겼다. 그런데 큰 기대를 안 했던 최 관장이 배우 못지않은 훌륭한 발성으로 호소문을 읽었다. 알고 보니 최 관장이 대본을 들고 성우 권희덕 씨를 찾아가 정확한 고저장단과 악센트 교습을 받았던 것.

“저도 깜짝 놀랐어요. 어떤 역할을 맡으면 쉽게 넘기는 사람이 아니라 연구하고 거기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그렇게 아끼는 최 관장이지만 잘못은 단칼에 잘라 지적한다. “‘최 관장 이건 틀렸어’라고 지적하면 얼굴이 빨개져서 아무 말 못하다가 ‘저는 그게 아닌데 잘못했습니다’라고 순순히 인정하죠. 그런 모습이 좋아요.”

노래를 했으면 패티김과 라이벌이 됐을 거라는 최 관장의 이야기를 전했다.

“오우 노∼. 그건 아냐. 연극배우가 그냥 노래를 하는 거지. 그렇게 비교하면 안 되지. 그분께 실례지. 신문 보고서 ‘왜 이렇게 봤어? 박정자는 박정자지 왜 패티김이야?’라고 혼내야겠구먼….”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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