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평화를 위한 4가지 조건

  • 입력 2007년 10월 1일 19시 25분


코멘트
이재호 논설실장
이재호 논설실장
평양 정상회담의 의제는 평화, 번영, 통일이다. 이 중에서도 평화가 핵심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어제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한반도 평화 정착을 가장 우선적인 의제로 다룰 것”이라고 밝혔다. 평화, 참 좋은 말이다. 누군들 전쟁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으랴. 남북이 총칼로 대치하고 있는 우리로선 이보다 더 간절한 염원도 없을 것이다.

평화를 누리려면 우선 어떤 상태가 ‘평화’인지에 대해 당사자들의 생각이 같아야 한다. 불행히도 남북은 그렇지 못하다. 남은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평화로 보지만, 북은 미군(美軍)이 남한에 더는 주둔하지 않는 상태를 평화로 본다. 따라서 이 차이가 해소되지 않는 한 어떤 평화도 진정한 평화라고 하기 어렵다.

북은 1974년 3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3차 회의에서 당시 허담 외교부장이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처음 주장한 이래 “평화는 미국과 논의해야 할 문제”라는 태도를 견지해 왔다. 1973년 1월 미국 월남 월맹 베트콩 간의 파리 평화협정 체결을 보고 ‘어떻게든 미국을 물고 늘어져야 일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게 계기가 됐다고 한다. 핵 개발 후에는 더 집요해졌다. 이유는 하나, 미군이 주둔할 명분을 아예 없애겠다는 것이다.

북이 원하는 게 체제 보장이라면 북-미 수교면 충분하다. 미국도 1995년 베트남과 수교했지만 평화협정 같은 것은 맺지 않았다. 그런데도 굳이 북-미 평화협정을 고집하는 것은 미군 때문이다. 북은 한국을 ‘갓’으로, 미국을 ‘갓끈’으로 본다. 갓끈만 잘라 버리면 한국은 휙 하고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한국은 갓, 미국은 갓끈”

이런 상황에서의 평화 논의는 국민에게 환상을 심어 주고 우리 안보에 부담을 줄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떻게 하면 이를 피해 제한적이나마 실효성 있는 평화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다음 4가지 전제가 충족돼야 한다.

첫째,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북핵이 완전히 폐기돼야 한다. 이 점은 벌써 많은 전문가가 누누이 강조했기에 여기서 재론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둘째, 북은 미군의 한국 주둔이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노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화에 관한 어떤 약속을 하더라도 그것이 한미 상호방위조약, 특히 미 육해공군의 남한 영토와 그 주변 배치를 명시한 제4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셋째, 북의 노동당 규약에 명시된 대남(對南) 적화혁명 노선은 삭제돼야 한다.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 과업을 완수한다’는 규약 앞에서 평화를 맹세할 수는 없다. 일각에선 “북에 적화노선 포기를 요구하면 북도 우리에게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할 것이므로 거론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노동당 규약은 공격적이고, 국보법은 방어적이다. 어떻게 양자를 동렬에 놓는다는 말인가.

넷째,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 등 그동안 남북이 합의한 모든 사항이 존중되고 실천돼야 한다. 이행이 보장되지 않는 합의는 불신의 골만 깊게 한다. 7·4공동성명(1972년)이 없어서 북이 남침용 땅굴을 팠고, 비핵화공동선언(1992년)이 없어서 북이 핵개발을 했으며, 6·15공동선언(2000년)이 없어서 서해교전이 일어났는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그래도 의미 있는 선언이 나오려면 최소한 이 정도의 조건들은 충족돼야 한다. 노 대통령은 이를 김 위원장에게 분명하게 제시하고 확답을 받아야 한다. ‘큰 틀에서의 합의’ 운운하며 적당히 넘어가선 안 된다.

개성공단이 전쟁 억지 역할?

노 대통령은 ‘평화’의 대가로 북에 상당한 규모의 경제 지원을 약속할 것이라기에 더욱 그렇다. 거론되고 있는 경제특구 조성과 경협사업 비용만 20조 원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런데도 알맹이도 없고, 실천도 보장이 안 되는 ‘평화선언’ 한 장 달랑 들고 돌아올 셈인가.

노 대통령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경제 지원과 평화의 선순환’도 평화가 평화다워야 의미가 있다. “제2의, 제3의 개성공단이 최고의 전쟁 억지력”이라는 청와대 참모들의 주장도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하다. 북이 무턱대고 받을 리도 없지만, 노회한 김 위원장이 그 의도를 모를까. 대통령이 국제정치학의 상호의존론에 빠져 있거나, 북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