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창용]양다리 경제외교

  • 입력 2007년 9월 17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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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 주최로 열린 국부운용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출장길에 나섰다. 국부운용포럼은 외환보유액이나 국민연금기금처럼 국가가 소유한 금융자산을 운용하는 전문가들이 모인 국제회의다. 산유국이나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는 이들 자원이 고갈될 때를 대비해 자원 판매 대금의 일부를 기금으로 적립하고 있는데, 이들 기금의 관리자도 주요 참석자다. 우리나라에서는 외환보유액을 관리하는 한국은행과 국가금융자산의 해외 투자를 전문화하기 위해 설립한 한국투자공사가 참석했다.

포럼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요 의제는 자산운용에 대한 내용이다. 수익률 제고를 위한 투자기법, 기금운용 독립성 제고를 위한 지배구조, 민간 전문가 영입에 필요한 임금체제 개선 방안 등 대부분의 나라가 공통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3일간의 회의를 통해 선진국의 발표를 들으면서 표면적인 주제 외에 왜 갑자기 국부운용포럼이 선진국의 관심사가 되었는지 속내를 깨닫게 됐다.

2000년대 들어 개발도상국의 해외투자 규모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유가와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 결과 러시아 등 산유국의 기금 규모가 커졌고,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보유액도 지난 10년간 10배 이상 증가했다. 그 결과 현재 개도국의 해외투자 자금은 6조 달러를 넘어섰고 이들 자산은 대부분 선진국 국채에 투자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국제자본이란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못사는 개도국이 잘사는 선진국에 투자를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판이다.

美-中 국부운용포럼서 신경전

국제금융시장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에 대해 선진국들은 미묘한 감정을 갖는 듯하다. 당장은 개도국의 해외투자가 늘어나 영업 기회가 확대돼 좋지만, 앞으로 제조업에 이어 금융업에서도 추격을 당할까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미국은 최근 280조 원이란 큰돈을 굴리기 시작한 중국 외환투자공사가 미국 기업을 사들이기 시작하자 이에 대해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국가가 직접 외국 기업을 사기 시작하면 무역 분쟁보다 더 큰 분란의 소지가 있다는 경고다. 민간 기업이 해외 기업을 인수하는 것과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민간기업의 경우 인수한 기업이 손해를 보면 자신도 피해를 보지만, 국부운용기관은 일정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전략적 투자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번 포럼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들은 국부운용기관의 국제투자에 대해 규제 방안을 만들자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다.

내심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사용해 금융산업의 해외 진출을 꾀하고 전략적 투자를 통해 핵심 기술도 도입하고 싶은 중국 측에서 보면 불쾌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과거 선진국 자본이 개도국 기업을 사냥할 때는 문제 삼지 않더니 상황이 역전되니까 다른 말을 하느냐고 항의하고 싶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인지 중국은 국부운용 국제포럼을 곧 중국에서 별도로 열겠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한국투자공사를 설립해 적극적인 해외 투자로 수익성을 올리고 국내 금융산업의 국제화를 추진하기로 한 만큼 심정적으로 중국 측 시각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중국이 거대한 외환보유액으로 우리나라 기업을 인수하기 시작하면 방관하기 어려울 것이다. 상품시장 개방 문제에 대해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끼여 처지가 곤란해진 것처럼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이번 문제 역시 한국의 사정은 매우 복잡하다.

편들지 말고 조용히 있는 게 상책

이럴 때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 주기보다 양다리를 걸치고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미국 회의에 참석했으니 중국 회의에도 참석해 조용히 앉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상회담에서 대놓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오신 대통령을 두고 ‘강대국 앞에서 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자랑스러워하는 386 참모가 많다 보니, 혹시나 경제외교의 기본이 양다리 전법이란 점을 잊을까 걱정된다. 아 참. 돌아가신 아버님도 비슷한 주의를 주셨다. 어머니 앞에서는 어머니 편을 들고 집사람 앞에서는 집사람 편을 들라고.

이창용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한국채권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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