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허승호]10억 달러짜리 자유

  • 입력 2007년 9월 10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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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생명의 가치는 무한하다’고 하지만 이는 생명의 고귀함을 강조하기 위한 선언적 명제일 뿐 우리는 목숨 거는 일들을 곧잘 한다. 고층건물을 짓고 다리를 놓는 일도 그중 하나다. 사고나 과실로 사망하는 인부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보상금이 지급되지만 그것은 미래소득의 손실에 대한 경제적 보상일 뿐 목숨 자체의 값은 아니다. 경제학자들은 생명 같은 비(非)금전적 요소를 금전으로 환산하는 방법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시간이 금(金)’이라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 우리는 돈으로 타인의 시간을 사고판다. 외국의 놀이동산 중에는 줄을 서지 않고 놀이기구를 먼저 탈 수 있는 우선이용권을 팔기도 한다. 이 경우, ‘줄을 서지 않는 편익’의 크기는 ‘이를 위해 당사자가 지불할 의사가 있는 금액’이라고 경제학자들은 본다. 생명에도 비슷한 산법(算法)이 적용될 수 있다. 위급한 순간에는 모든 것을 바쳐 목숨을 건지려는 사람도 많겠지만, 평상시 평가된 본인 목숨 값은 ‘사고예방에 쓸 용의가 있는 비용×사고 발생 확률’ 정도로 계산할 수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현대·기아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의 비리에 대한 항소심 결과를 ‘10억 달러짜리 자유’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정 회장이 비자금 조성, 계열사 주식 편법상속 등의 행위에 대해 8400억 원을 사회에 환원하는 조건으로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것을 이렇게 비꼰 것이다. 재판 후 현대자동차 사람들의 밝은 표정과 재계(財界)의 환영 성명으로 미루어 그의 자유는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을 비롯한 주요 외신은 “화이트칼라 범죄에 관대한 한국 사법부의 풍토가 재확인됐다”고 비판했다. 불법 경영으로는 세계화의 험난한 파고를 넘기 힘들다. 이런 고민 때문에 재판부도 이례적으로 “실형 선고 여부를 놓고 식당 손님과 택시운전사들에게까지 의견을 물어봤다”고 밝혔을 것이다. 정 회장 자신은 물론 현대자동차나 재계가 이번 판결에서 ‘10억 달러짜리 교훈’을 얻었기 바란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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