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칼럼]누가 대학을 취업훈련장 만드나

  • 입력 2007년 8월 12일 19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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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사람이 되지”/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윤동주 시편 ‘아우의 인상화(印象畵)’에 보이는 대목이다. 생전에 발표되었던 몇 안 되는 시편의 하나로 실제 상황을 적었다고 추정된다. 식민지 상황에서 장래의 포부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기가 어려운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형의 물음에 아우는 ‘사람이 되지’라고 또렷하게 말한다.

어린 아우의 자생적 포부이건 내면화된 가훈(家訓)의 복창이건 간에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전통사회에서 인간교육의 목표이자 지향이었다. 인두겁을 쓴 짐승이 얼마나 많은가?

논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의 구체와 의미를 쉽고도 깊이 있게 보여 준다. 20세기의 가다머가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이념이라 평가했던 형성 혹은 교육(Bildung)도 느슨하게 말하면 ‘사람됨’의 뜻이다. 교양을 통해서 사람다움으로 올라가는 것이란 뜻이다.

우리 사회의 사나운 교육열은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다. 포항공대가 1997년에 공표한 통계수치를 보면 인구 대비 대학생 비율이 한국 3.41%, 미국 3.35%, 호주 3.24%, 프랑스 2.88%, 독일 2.29%로 돼 있다. 전문대를 제외한 4년제 대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인 순수 학생만 포함된 수치인데 우리가 세계 최고이다.

교육의 목적은 ‘사람 만드는 것’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1939년 당시 독일의 대학생 총수가 약 4만 명으로 인구의 0.1%에 지나지 않았음을 참조하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거기다가 해외 유학 및 연수에 드는 비용은 막대한 액수에 이른다. 통계수치만으로 보면, 또 학력을 사회 구성원 수준의 한 지표로 본다면 우리는 모름지기 많은 국면에서 세계 최고가 돼야 마땅하다.

교육은 국민적 관심사여서 누구나 일가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지원자 선발에서 내신 반영률을 얼마로 할지와 같은 세부 사항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고등교육의 목적이나 실제적 기능에 대한 논의는 찾기 힘들다.

대학은 흔히 비판적, 합리적, 개방적 사고를 훈도하며 사회적 수요에 응함을 근본 목적으로 표방한다. 그러한 고등교육의 이상을 과연 얼마만큼 실현하는가에 대한 자기반성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민주사회에서 시민 각자의 도덕적 의무는 각별한 무게를 갖는다. 지각 있는 비판적 사고를 도야해서 기필코 총명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태만히 할 때 그것은 사회의 재앙으로 귀결된다.

우리의 고등교육 기관은 과연 스스로 표방하듯이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시민 배출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가? 간헐적으로 나라를 휩쓸고 지나가는 집단 히스테리 증상이나 정치권력의 대중조작에 맥없이 말려드는 일은 없는가? 집단 혹은 지역 이기심에 호소하는 빛 좋은 당근에 싸구려 양심을 파는 일은 없는가? 교육기관이 이러한 비합리적이고 반지성적인 행태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길러 내지 못한다면 단순한 인력 공급소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근자에 있었던 인문학 위기 논의가 인문학도의 입지 향상이란 측면에서만 논의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인간 형성이란 인문교육의 고전적 명제는 도외시되었다.

실종된 인간 형성 목표 복권을

교육의 근원적 목적에 대해 초심으로 돌아가 우리의 오늘을 냉철히 돌아보아야 할 때다. 교육은 삶의 한 시절에 누구나 겪어야 할 한시적 지옥 훈련이나 통과의례가 아니다. 평생을 두고 꾸준히 실천해야 할 ‘사람’ 되기 위한 노력이다.

“학교교육의 목적은 성장을 보증하는 여러 힘을 조직함으로써 교육의 지속성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갈파한 존 듀이의 말은 백번 옳다. 점점 비속화되고 부박해지는 세계에서 우리는 실종된 인간 형성의 목표를 다시 복권시켜야 한다.

대학은 단순한 취업 훈련장이 아니다. 최근의 잇단 학력 추문도 대학을 단순한 취업 훈련장으로 간주하는 사회 풍토가 빚어 낸 병리 현상이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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