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기홍]美시골마을서 만난 ‘6·25’

  • 입력 2007년 7월 19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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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주말, 미국 출장길에 워싱턴에 들른 친구를 어디로 안내할까 고민하다 차를 동쪽으로 몰았다. 석회암 동굴이 차로 1시간 반 거리에 있다는 얘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존 덴버의 노래 ‘Take me home, Country roads’에 나오는 셰넌도어 강을 지나 페이지 카운티란 곳에 들어서니 ‘루레이 동굴’이라고 적힌 커다란 간판이 보였다.

거대한 동굴 속을 걷기를 20여 분. 기기묘묘한 석순(石筍)들을 훑던 중 구석에 놓인 작은 동판(銅版)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엔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페이지 카운티 출신 참전군인들’이란 제목 아래 5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 시골 마을에서도 6·25 때 숨진 사람이 많구나.”

친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2. “기념비 헌화 일정은 없던 걸로 합시다.”

지난해 10월, 워싱턴을 공식 방문한 한국 국회의원들이 주미 한국대사관 측에 갑자기 일정 변경을 요구해 왔다. 일정에 들어 있던 한국전쟁 기념비 헌화에 대해 일부 의원이 “왜 상임위원회 명의로 그런 데 헌화를 하느냐”며 거부해 기념비 방문이 취소됐다.

최근 참전군인 단체에서 이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들은 한 싱크탱크 연구원은 “미군의 참전을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인식이 한국 지도층에까지 퍼져 있는 걸 실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발전상이 알려지면서 미국에선 과거 ‘잊혀진 전쟁’으로 불렸던 한국전쟁이 ‘잊혀져선 안 될 승리(unforgotten victory)’로 새롭게 조명되는 것과 대조적”이라고 덧붙였다.

3. “어머니. 황혼이 내려앉는데 사람들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갑판 아래쪽엔 피란민들이 너무 빽빽이 들어차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화장실은커녕 물도, 음식도 없습니다. 갑판 위의 사람들은 서로 껴안은 채 온기를 유지하려 애씁니다. 엄마는 아기를 감싸 안고, 아들은 아빠의 낡은 코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바라보노라면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이 쏟아집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처럼 집이 그리웠던 때는 없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죽음과 파괴, 지독한 절망이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한국을 제 마음과 영혼에 담습니다. 한국인들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대단한 인내심과 용기를 보여 줍니다. 그들과 함께, 그들을 돕는 자리에 있다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1950년 12월 당신의 사랑스러운 아들 러니.”

(1950년 12월 흥남에서 피란민 1만4000명을 거제도로 실어 나른 미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원 J 로버트 러니 씨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4. 한국은 6월 25일에 전쟁 관련 행사를 하지만 미국에선 정전협정이 맺어진 7월 27일에 기념행사를 연다.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이란 사실이 중요한 한국과 달리 미국인들에겐 5만 명이 넘는 젊은이가 숨져간 전쟁이 멈춘 날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 대부분은 강대국의 패권다툼, 거창한 이데올로기 전파를 위해서가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켜 달라는 부름에 응한’(한국전쟁 기념비의 문구) 평범한 마을 청년들이었을 것이다.

“해럴드. 호수에서 놀던 날 라디오에서 북한이 한국을 침공했다는 뉴스가 나오자 자네는 ‘코리아가 어디야?’라고 물었지. 자원해 한국으로 달려간 자네에게 보내 주던 지역신문이 ‘수취인 작전 중 실종’이란 도장이 찍혀 반송돼 온 날, 난 자네 어머니와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네….”(미국 시민 로버트 푸오코 씨가 6·25전쟁에서 전사한 친구를 추모하며 쓴 편지, ‘Korean War Project’ 웹사이트에서)

이기홍 워싱턴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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