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재락]현대차 평조합원의 소망

  • 입력 2007년 6월 19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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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3세인 한모 씨가 현대자동차에 입사한 것은 1988년. 노조 설립 이듬해로 한 씨는 20대 중반의 총각이었다.

울산에서 고교를 졸업한 한 씨는 노동운동에 대해 잘 몰랐지만 집회장에서 노동가를 부를 때면 자신도 모르게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렸고, 노조의 파업과 집회에는 꼬박꼬박 참석해 왔다.

하지만 25∼29일로 예정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반대를 위한 금속노조의 파업에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부모와 아내, 딸(고2), 아들(중3) 등 다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특근을 하고 싶었지만 최근 4년 동안 한번도 못했다는 한 씨. “나도 자식 교육 잘 시켜 고생 안 하고 살게 하고 싶다”며 “파업으로 월급이 줄어들고 혹시 직장을 잃으면 당장 교육비가 모자라고 식구들이 굶을 판인데 왜 또 우리가 파업을 해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금속노조 파업 결정에 대한 나의 생각’이란 제목으로 16일 금속노조 현대차 지부 홈페이지에 올린 한 씨의 글은 18일 현재 1600여 건의 조회에 수십 건의 동조 글이 올라오는 등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노조 간부와 대의원을 아홉 차례 지낸 현직 대의원 A 씨는 파업 철회를 촉구하며 ‘투쟁의 상징’인 빨간 조끼를 반납하고 대의원직을 사퇴했다.

이들 외에도 파업 반대 목소리가 현대차 안팎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노조 설립 20년 만에 파업 반대 목소리가 이처럼 큰 적은 없었다는 게 나이 많은 노조원들의 전언이다.

이번 ‘파업 태풍’의 한가운데는 금속노조 정갑득(49) 위원장과 이상욱(43) 현대차 지부장이 서 있다.

이들은 현대차가 산업별 노조로 전환(2006년 6월)되기 전까지 노조 위원장을 두 차례(정 위원장은 6대 8대, 이 지부장은 9대 11대) 지냈다. 정 위원장은 비록 낙선했지만 현대차 노조원들의 지지에 힘입어 민주노동당 공천을 받아 2005년 10월 울산 북구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이 지부장은 올 3월 금속노조 전환 이후 치러진 초대 지부장 선거에서 당선됐다. 현대차 노조 사상 처음으로 세 번째 수장이 된 셈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노조 위원장 선거에서 현장 조직들 간에 숱한 합종연횡이 이뤄졌지만 두 사람이 속한 조직끼리는 한 번도 손을 잡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금속노조 위원장과 현대차 지부장이라는 상하관계로 만났다. 이 지부장도 “상급단체인 금속노조의 파업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누누이 밝혔다.

하지만 이 지부장의 ‘상급단체 복종’ 방침은 지금 거센 역풍(逆風)을 맞고 있다. 잦은 파업과 노조 간부들의 잇단 비리,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치지 않고 파업에 돌입한 점 등에 많은 노조원이 실망해 반(反)파업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조합원인 한 씨는 “전체 조합원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성공한 파업이라 볼 수 없다”며 파업 철회를 간곡히 부탁했다.

교육비와 생활비를 걱정하며 파업에 반대하는 한 씨의 소박한 이 권고를 따를 것인가, ‘불가근불가원’ 관계였던 정 위원장의 금속노조 방침을 따를 것인가. 이 지부장은 지금 칼날 같은 시험대에 올라 있다.-울산에서

정재락 사회부 차장 ra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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