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김근태의 2007년 여름

  • 입력 2007년 6월 1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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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김상현 전 의원은 그를 “쉬운 일을 아주 어렵게 설명하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햄릿’이라는 별명처럼 신중하고 생각이 많은 탓이다. 그래서 그런지 김 전 의장의 말은 늘 중의적(重意的)이다. 당의장 시절 내걸었던 ‘따뜻한 시장경제’란 구호만 해도 성장과 복지를 결합하겠다는 취지였지만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한 서민이 얼마나 됐을지 의문이다.

행보도 일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곡선이다.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이 따라다니는 이유다.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에 복귀한 후 국민회의를 창당했을 때도 ‘민주당 분당 반대’를 외치다가 막판에 합류했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극(劇) 때도 단식까지 하며 반대하다가 결국 열린우리당을 선택했다. 당의장에 취임해서는 ‘뉴딜’을 내걸더니, 그만둔 뒤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에 반대해 단식을 벌였다. 때로는 헷갈리기까지 하는 그의 행보에 대해 한 지인은 “‘안 돼요, 안 돼요’ 하다가 ‘돼요, 돼요’라고 하는 스타일”이라고 꼬집었다. 돌고 돌지만 결국 ‘현실’을 택하거나 ‘본래의 색깔’로 되돌아간다는 얘기다.

그런 그가 어제 범여권 대통합의 밀알이 되겠다며 탈당과 함께 대선 불출마 선언을 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7명의 주자 가운데 맨 먼저 경선 포기를 선언한 것의 재판(再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에 대한 지지도가 낮다는 점은 같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1987년 대선에서 양김(兩金) 분열로 정권교체에 실패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는 불출마 선언 직전 정대철 정동영 씨 등과의 조찬 회동에서 눈물까지 쏟았다.

그의 눈물에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울분도 담겨 있는 듯하다. 정치권 내 재야 운동권 그룹의 ‘맏형’ 격인 그는 사석에서 “‘짝퉁 진보’ 정권 때문에 민주화 세력과 진보 그룹이 다 망하게 됐다”는 불만을 자주 토로했다. 이 정권의 실정(失政)으로 여권이 절멸(絶滅)할지도 모르는 판에 노 대통령이 ‘교조 진보’ 운운하며 진보진영을 비판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그는 5년 전 경선을 중도 포기한 뒤 당시 노무현 후보에게서 선거대책위에 들어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노무현은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일 뿐, 제대로 된 개혁·진보세력인지 믿기 어렵다”는 불신감 때문이었다는 후문이 있다.

그는 이 정권에서 보건복지부 장관과 여당 의장까지 지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에게 실정에 대한 동반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그의 ‘의식의 시계’가 여전히 1987년에 멈춰 있다는 점이다. 그는 지난해 “진보가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에 무능했다”고 자책했지만 정작 이라크 파병, 한미 FTA에 대해선 반대했다. 우회전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을 한 셈이다.

1980년대식 ‘민주화 세력 우월론’으로 정권 재창출을 해야 한다는 논리도 시대착오적이다. 국민의식과 시대정신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넘어 선진화로 가고 있는데 여전히 민주화의 깃발 아래 모이자고 하면 누가 얼마나 모이겠는가. 그는 20년 전 6월 민주항쟁 때 감옥에 있었다. 그때와 2007년 여름의 대한민국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아직도 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동관 논설위원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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