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은령]6월의 태극기

  • 입력 2007년 6월 8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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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에 대한 맹세문’이 다음 달 바뀐다고 한다. 맹세문 수정을 위해 8일까지 국민 설문조사를 벌이는 행정자치부는 예시이긴 하지만 문안들을 내놓았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국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이라는 엄숙한 약속도 있고, ‘…사랑과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라는 조금은 낭만적인 다짐도 있고, ‘…정의와 진실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이라는 혼인서약풍의 문구도 있다.

내게 새로운 발견은 이 맹세문이 1968년 충남도 교육위가 자발적으로 만든 것을 1972년 문교부가 전국 학교에 시행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태어난 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대통령은 한 사람이었기에 어느 나라나 대통령은 한 사람이 계속하는 줄 알았다. 초등학교 입학하며 달달 외운 ‘맹세문’도 ‘원래부터’ 있던 것인 줄만 알았다.

마음에 있든 없든 늘 해야 하는 맹세가 부쩍 불편해졌던 것은 사춘기 들어서였다. 베이징조약 난징조약…그 많은 굴욕적인 조약의 이름을 연대별로 외우며 열강에 국권이 침탈돼 가는 역사에 분노했지만 아무리 피 흘려 되찾은 태극기라 해도 낳아 준 부모도, 연인도 아닌 태극기를 앞에 두고 ‘조국과 민족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은 인간적이지 않았다.

시켜서 손에 든 것이 아니고 스스로 커다랗게 펼쳐 든 태극기의 모습이 뇌리에 남았던 것은 1980년 광주의 사진 속에서였다. 시위대가 펼쳐 든 태극기. 그것은 “총구를 겨누지 마라. 우리는 폭도가 아니라 이 나라의 국민이다”라는 절규였다.

그리고 1987년 6월, 훗날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진으로도 뽑힌 한 장의 사진은 한 청년이 태극기를 앞세운 시위대 선두에서 바람처럼 달려가는 모습이었다. 사진의 캡션은 ‘아! 나의 조국’.

거리에서 다시 태극기를 만난 것은 2002년 6월이었다. 월드컵 응원에 나선 젊은이들은 저 높은 깃대에 매달려 있던 태극기를 내려 셔츠로 입고, 치마로 두른 채 “대∼한민국!”을 외쳤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짐하지 않아도 되고, 순국을 각오하지 않아도 되는 태극기. 더는 ‘맹세’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제 광화문의 태극기는 흔하다. 태극기를 흔들며 외치는 구호들도 제각각이다. 현충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는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등장했다. 20년 전 젊은이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히 채우고 앉아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그 자리에 중·노년이 주류인 종교단체와 보수단체 회원 2만5000여 명이 모여 “북핵을 폐기하라, 대북 지원을 중단하라”고 외쳤다. 10일 낮에는 바로 그 서울광장에서 1987년 6월 항쟁 20주년을 기념하는 시민들의 대행진이 남대문을 거쳐 명동성당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그 대열도 태극기를 들까?

태극기 앞에서 하고 싶은 맹세는 저마다 다를지 모른다. 지키고 싶은 조국과 민족도 ‘너희는 빼고 우리끼리’일지 모른다.

그 다른 외침들이 오늘 광장에 함께 아우성처럼 나부낄 수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침묵 속에서 소망했던 것을 생각한다. 국민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지 않고 행복을 침해당하지 않으며 위협받지 않는 그런 대한민국을 꿈꾸었던 사람들을….

맹세는 그곳에 있다.

정은령 사회부 차장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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